부르한 쉔메즈의 소설 [이스탄불 이스탄불]
감방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주로 여자 얘기 아니면 먹을 것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반체제 인사였던 신영복 선생이 쓴 글에서도 '교도소 안에서 빌려 읽는 책 중 가장 인기 있는 건 요리책이었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같은 감방이라도 천일야화의 본고장인 이스탄불에 있다면 조금 다른 구라가 펼쳐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터키의 인권변호사 출신인 부르한 쉔메즈의 소설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동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도시 이스탄불의 지하 감방을 무대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동서가 아닌 위아래로 나누어버린다.
지중해의 파도가 넘실대는 도시 이스탄불 위에서는 바쁜 도시인들의 삶이 펼쳐지지만 햇빛조차 들어오자 않는 지하 몇 층 깊이 감방 안에선 피투성이 네 남자가 비틀거리며 만나게 된다. 따로 불려 나가 전기충격, 매달기, 물고문 등을 당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함께 지내게 된 이 남자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자신이 경험하거나 들었던 이야기들을 각색해서 들려준다.
시를 사랑하는 이발사 카모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분노에 떨고 있고 이제 열여덟 살인 대학생 데미르타이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의대생인 아들을 병원에 숨기고 아들 대신 감방에 들어온 중년의 의사와 2주 전 군경찰에게 체포되었던 거물급 노인 퀴헤일란까지 내 명의 죄수들은 마치 세헤라자드가 된 듯 개와 양의 이야기부터 멜빌의 [모비딕]을 변형한 흰고래 이야기, 말하는 벽, 늑대로 변한 신부, 세상의 시계가 10분 늦게 가게 된 것을 눈치챈 도서관장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청산유수로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때로는 너무 웃기고 황당한 이야기라 자기들끼리 낄낄낄 웃기도 하고 근친상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날로 업그레이드시키며 추리력을 뽐내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고 고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간수의 부름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에서는 이승우의 어떤 단편소설이 생각났고 대못으로 손에 못을 박아버리는 잔혹한 고문 장면에서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부르한 쉔메즈가 그려낸 감옥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메타포가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눈부신 이스탄불의 바다와 하늘을 꿈꾸지만 몸은 지하 감방에 갇혀 있는 신세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존재들이다. 이스탄불의 지하 감방에 갇힌 네 남자들도 상상력으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마지막 장면엔 지중해가 보이는 발코니에서 파티를 한다. 비록 오늘은 고통이지만 어제는 이상적인 나날이었고 내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상의 세계다.
이 세상 어디서나 반체제 인사들은 고통을 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인터넷으로 이스탄불의 역사를 잠깐 찾아보니, 오스만 제국 등의 유서 깊고 복잡한 역사를 거친 터어키는 현 정권의 이슬람 독제체제 덕분에 2013년부터 정치적 저항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정치적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사람이니 소설에 자전적 요소들이 많이 담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네 남자의 풍부한 상상력과 입심 덕분에 심각하거나 지루할 틈 없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샘솟는다. 책에도 나오지만 [데카메론]이 흑사병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한 귀족들의 음담패설의 향연이었다면 이 소설은 이스탄불이라는 매혹적인 도시를 사랑한 사내들의 꿈과 바람에 대한 이야기다.
코로나 19가 가져온 팬데믹을 맞아 읽기에는 퇴폐적인 데카메론보다 몇 배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이 소설을 낸 황소자리의 지평님 대표는 소설을 다섯 번이나 읽고 책을 내기 전에 두 차례나 이스탄불을 다녀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스탄불' 하면 오르한 파묵을 떠올렸지만 이제부터는 이 소설이 맨 앞에 놓일 것 같다는 자부심과 애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나도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