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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17. 2021

오랜만에 읽은 신춘문예 당선작

강보라의 <티니안에서>

사이판에서 가까운 섬 티니안으로 3박4일 여행을 떠난 중학교 동창 수혜와 민지의 이야기다. 그들은 거기서 '펫맨'과 '리틀보이'라는 미국 남자들을 만나는데 알고 보니 그 이름은 히로시마와 나카시마에 떨어졌던 두 개의 원자폭탄 이름에서 따온 짓궂은 농담이었다. 이 섬은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고 원자폭탄들을 보관했던 '맨해튼 프로젝트' 기지였던 것이다. 민지는 처음 보는 미국 남자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수영복 상의를 벗고 노는 수혜가 못마땅하다. 그러면서 한창 성욕이 왕성했고 그 욕망에 충실했던 중학교 시절 '걸레 삼총사'라 불리며 전교에서 따돌림과 폭행을 당했던 수혜와 나, 그리고 연선을 떠올린다. 갑자기 '증발'해버린 연선과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비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궁금해하면서.


당선소감을 읽어보니 작가 강보라는 '어린 여성의 성욕'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신춘문예의 소재로는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읽어보면 적당한 등장인물들의 효과적인 배치는 물론 실감 나는 대화와 과감한 생략 등을 통해 주제의식을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 민지는 중학교 시절 호기심으로 자신과 몸을 섞은 뒤 자신을 걸레 취급했던 남자들의 SNS를 뒤지며 '그들이 좀 불행했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을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소설은 '영혼이 자유로운(사실은 몸에 헤픈)' 여자애들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꼰대스러운 시각과 그게 그렇게 나쁜 건가?라고 되묻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여러 가지 상황이나 메타포를 통해 전달하는데 특히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 플레임 트리에 대한 묘사나 - 약한 바람에도 새빨간 꽃잎을 폴폴 날리는 아름답지만 헤픈 나무 - 여행이 끝나갈 때쯤 민지가 느꼈던 황량함을 묘사하는 문장이 - 사흘간의 여행이 나만 못 알아들은 농담처럼 느껴졌다 - 너무 좋았다. 하다못해 섬에 와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썬글라스' 남자의 "그러고 보면 역사란 거대한 아이러니의 텍스타일인 것 같아요."라는 멋 부린 대사 바로 뒤에 "저 밥맛은 뭐래."라고 비웃는 수혜의 속삭임을 붙인 것조차 너무 귀여웠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전날 미국 남자들과 번갈아 키스를 나누던 수혜가 결국은 아무 일 없이 돌아오는 장면 처리가 좋았고 돌아오는 경비행기 안에서 두 친구가 헤드셋을 부딪히며 웃는 장면은 통쾌했다. 오랜만에 읽어본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는데 느낌이 좋아서 짧게라도 리뷰를 남겨보고 싶었다. 그래서 썼다. 다시 말해 추천한다는 얘기다, 이 멋진 단편소설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22213120005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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