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r 09. 2021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놓친 감동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리뷰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영화의 주요 장면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화 『미나리』의 엔딩 씬이 나오고 자막이 올라가자 아내와 나는 약간 멍해졌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 너무 좋은데 도대체 이 영화의 '감동 포인트'는 어디 있는 거지? 내가 학교 다닐 때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같은 문제의 답을 단답형으로 찾는 교조적인 교육에 너무 빠져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첫째, '미나리'라는 제목이 설마 그 식물이 아무 데서나 뿌리내리고 잘 자란다는 뜻 때문에 쓴 건 아니겠지 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뱀이 나오는 장면에서 윤여정이 손자에게 "놔둬.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게 더 무서운 거야."라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 탈무드적인 교훈이라 설마 했는데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어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에서 착상한 장면이라고 한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스티브 연이 수평아리들은 맛도 없고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다면서 아들에게 우리 남자들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너무 예상하기 쉬운 메타포라 식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장면이 싫은 건 아니다. 다만 너무 딱 들어맞는 대사들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사실 시나리오 상태에서 보면 이런 대사들이 굉장히 좋은 대목들이겠지만 막상 작품으로 나올 땐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감독들의 데뷔작이 다소 '과잉'처럼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균형 있는 좋은 작품들을 처음부터 만드는 감독이나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리뷰를 몇 개 찾아보았다. 1980년대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다루었다는 얘기에는 동의하겠는데 그게 그토록 감동적인 건가 하는 반감이 들었다. 당시의 한국 남성들은 굉장히 가부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연의 대사나 행동은 너무 쿨해서 비현실적(오히려 미국 현지인 같았다)인 게 아니가 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윤여정의 이름이 순자라는 건 어떻게 안 걸까. 영화엔 할머니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던데. 화제가 되고 있는 윤여정의 연기도 물론 좋지만 나는 스티브 연과 한예리의 연기가 더 좋았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다 훌륭하다. 이웃에 사는 광신도로 나오는 윌 패튼은 케빈 코스트너와 숀 영 주연의 영화 『노 웨이 아웃』에 나왔던 그 배우라 너무 반가웠다(진 해크만 앞에서 권총 자살을 하던 바로 그 배우!). 내가 그를 알아본 게 기적 같이 느껴져서 아내에게 그 자랑을 계속할까 하다가 괜히 핀잔만 들을 것 같아서 겨우 참았다.


영화를 보기 전 사전 지식이나 마음의 준비를 너무 안 하고 온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어떤 사건 이후 아빠와 아들이 미나리를 뜯는 장면에서 그냥 끝내버리다니. 너무 절제를 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어떤 '사건'과 '해결'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극적인 요소가 너무 없다. 대신 어떡하든 살아보려는 간절한 마음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 등 인류 보편적 정서가 가득하다. 이 영화는 감독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 삼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걸 염두에 두고 봤으면 영화가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이라서, 또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즉 이 모든 게 너무 익숙해서 영화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차라리 외국인의 눈으로 영화를 한 번 더 보면 어떨까..... 그러나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가, 코즈모폴리턴적 시각을 가진 것도 아닌 내가 과연 그런 신공을 발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회의적이다. 골든 글로브나 아카데미상 수상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가 더 작고 소박했는데 내가 다른 마음을 먹고 영화를 봤구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 너무 보도가 많이 되어 내가 삿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반성한다. 어떤 텍스트를 대할 때 오로지 작품만으로 대하기가 이토록 어렵다. 차라리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 더 행복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영화 리뷰를 쓴다는 게 어느덧 반성문으로 변했다. 아, 새벽부터 일어나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매거진의 이전글 다정한 이름들이 난무하는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