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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21. 2021

포장마차라는 따뜻한 타임머신

연극 『역전의 용기』

타임슬립이라고 하면 SF영화에 나오는 금속성 세트나 첨단 과학을 떠올리기 쉽지만 상상력만 있으면 포장마차를 타임머신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프로젝트 2H' 연극  『역전의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탤런트 양희경 선생의 아들들(배우+연출) 하는 연극이라고 해서 흥미를 유발했던  작품은 어느 기차역 앞에 있는 작은 포장마차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작은 포장마차지만 오는 손님들의 옷차림과 대사에 따라 2002 한일월드컵 때가 되기도 하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가 되기도 한다.  70년대 방직공장에 다니던 미싱사들이 와서 국수와 오뎅  그릇에 고단한 삶을 털어놓기도 한다.

연극은 참 신기하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린 사업가나 중문과 다니는 '3포세대' 대학생들의 몸짓과 대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급기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넓은 품으로 안아주는 포장마차 주인 한승현의 인간적인 매력이 든든하고 후반에 트렁크에 쓰레기를 넣고 다니는 정신 나간 여자 역의 강지현이 작품에 활기를 더한다. 트렁크  여자와 외로운 사업가 사이에서 작은 반전이 일어날 때는 훌쩍훌쩍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도 있다.

포장마차라는 공간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처럼 훌륭한 포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연 때 이처럼 훌륭한 얼개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입혀가기만 한다면 소극장 연극으로 롱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코러스 역할이 없어 포장마차 주인 혼자 너무 바쁘다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바뀔 때마다 롱 스팟 하나만 켜놓고 이야기를 하는 '멀티맨'도 하나 존재했으면 하는 욕심도 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 전체에 BGM처럼 깔리는 양희경의 '가요 응접실'도 이야기 본류에 좀 더 개입하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마지막에 바보 같은 실수를 했든 정신이 좀 이상한 여자든 가리지 않고 카운터로 불러 국수를 말아주는 주인장의 모습에서는 레이먼드 카바의 단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하는 것들』 끝 장면이 떠올랐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더라도 뜨끈한 국물과 먹을 것을 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살아봐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동서양 어디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밖으로 나와 계단을 오르기  한원균 연출가처럼 보이는(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있길래 아내가 "연출님이시죠?"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해서  봤다고 인사를 했다. 따뜻하고 재미도 있는  연극은 대학로 KFC 지하에 있는 '공간 아울'에서 3 28일까지 상연한다. 놓치지 마시라. 참고로 오늘은 만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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