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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08. 2019

난생처음 받은 기립박수, 그리고 노회찬에 대한 추억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을 보고 떠오른 에피소드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살면서 딱 한 번 '기립박수'를 받아본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무슨 사연으로 인해 광고대행사를 떠나 충무로의 어느 인쇄물 업체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던 예전 회사 동료가 급하게 카피라이팅을 부탁해서 달려갔더니 그 인쇄업체 사장님께서 내친김에 프리젠터까지 해줄 수 없느냐고 내게 물었던 것이었다. 클라이언트는 놀랍게도 '군인공제회'였다. 퇴역한 군인들이 주로 근무하는 탓에 매우 보수적이고 비리도 많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군인공제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싶어서 리플렛을 전면 개정하기로 하고 경쟁PT를 붙였는데 그 업체도 문제의 피치에 참석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보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 욕심에 못 이기는 척 사장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프리젠테이션을 내가 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간단한 기획서를 쓰는 일도 나에게 맡겨졌다. 큰일이었다. 도대체 군인 장성 출신들 앞에 서서 뭐라 얘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TV에서 '손석희의 100분토론' 마지막 회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회라 그런지 평소의 진지함에서 벗어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분위기였는데 후반에 박원순 변호사의 인터뷰가 나오면서 손석희와 박원순, 노희찬이 모두 1956년 동갑내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순간 방청객들은 경악했고 손석희 앵커가 웃으며 "굳이 답변을 드리자면 제가 동안이 아니라 박 변호사님께서 노안이십니다"라는 농담을 했다. TV를 보며 바보처럼 따라 웃던 나는 갑자기 바로 저거다,라고 무릎을 쳤다. 그래, 내일 군인공제회에 가서 저 얘기를 하는 거야!

군인공제회 사무실은 당시 대한민국 1%가 모여 산다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바로 옆 건물 안에 있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군인공제회가 이런 건물 안에 들어와 있으니 돈 많다고 소문 나는 게 당연하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12층에 있는 PT 대기실에서 중얼중얼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경쟁사들은 우리까지 포함해 모두 네 곳이었는데 모두 대기실 한 곳에 모여 있어서 서로 인사도 안 하고 각자 발표 차례가 될 때까지 뻘쭘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연습을 마친 나는 클라이언트 측 실무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여기는 장교용 화장실밖에 없어서요. 죄송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셔야겠는데요." 즉 평민이자 사병 출신인 내가 소변을 보려면 11층이나 13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시추에이션이냐고 항의를 하려다가 화장실 때문에 남의 PT를 망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11층 남자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문제조차도 이러한데 어떻게 군인들의 마음을 바꾼단 말인가, 하는 어두운 생각이 들었다.

내 차례가 되어 PT룸에 들어간 나는 PPT를 켠 뒤 군인공제회 간부들을 모셔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군인공제회 리플렛 개선안을 설명드리게 된 카피라이터 편성준 실장입니다. 며칠 전부터 전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어떤 이야기를 드려야 할까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제 TV에서 백분토론 마지막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켜놓은 PPT에는 손석희와 노회찬, 박원순의 얼굴이 나란히 떠 있었다.

"혹시 세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네. 셋 다 56년생 동갑이랍니다."

내가 이렇게 운을 떼자 한쪽에서 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공감의 웃음소리였다. 용기를 얻은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세 사람 중 누가 제일 젊어 보이십니까? 제가 손석희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태로는 누가 봐도 손석희 앵커가 가장 젊어보일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미지! 손석희 앵커가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 평소 샤프하고 나이스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인공제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리플렛부터 기존의 고루한 컬러와 레이아웃을 버리고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야 합니다..."

서두를 이렇게 제압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리플렛 시안 설명을 하는 동안 모든 심사위원들이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초집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내가 시안 설명을 모두 끝내고 인사를 하고 나니 모든 심사위원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기립박수였다. 그날 그 PT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승리했음은 물론이다.


"바로 그 순간, 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노회찬에 대하 규정, 혹은 재인식을 생각해냈던 것입니다. 즉,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이번 4.3 지방선거 기간 중 튀어나온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한 비인간적 언사에 대해 손석희 앵커는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을 얘기할 때는 거의 방송사고에 준하는 목메임이 있었다. 그 눈물겨운 칼럼을 들으니 예전 기립박수 사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PT에서 이겼던 것도 다 노회찬 전 의원의 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는 고마워하면서.


이유나 상황이 어떻든 노회찬 같은 사람이 그렇게 가는 곳은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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