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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0. 2021

건강한 불량식품을 먹는 기분

김혼비 산문집 『다정소감』 리뷰

온라인 구독 서비스로 여러 작가들의 글을 받아 읽던 때가 있었는데 그땐 마음이 심하게 비뚤어졌었는지 연재되는 모든 글이 다 재미없고 시시하기만 했다. 마치 작가들이 '이건 원고료를 많이 받는 글도 아니고 경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대충 쓰자'라고 모여서 협약이라도 하고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을 하며 읽다가 무릎을 탁 쳤던 글이 바로 김혼비의 '김솔통 이야기'였다. 정식 제목이  <마트에서 비로소>였던 그 글을 읽고 흥분한 나는 바로 이런 리뷰를 남겼다.


오늘 저녁 김혼비의 <마트에서 비로소>를 읽고 비로소 환호성을 질렀다. 전작 『아무튼 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혼비의 에세이는 재미있고 유익하다. 어쩌면 유익한 척을 안 해서 더 유익한지 모르겠다. 혹시 할 수 있다면 그가 쓴 '김솔통'에 관한 글을 읽어보시라. 사소한 듯하면서 준엄하고 힘을 뺀 듯하면서도 어깨의 잔근육이 느껴지는 에세이를 경험하고 싶다면 말이다. 김혼비와 아는 사이도 아니고 돈을 받은 적도 없는데 이렇게 취향 편향적인 글을 써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최근 읽은 열몇 편의 에세이 중엔 김혼비의 것이 제일 좋았기에 굳이 이런 코멘트를 남긴다.


새로 나온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을 펼치니 그때 읽었던 '김솔통' 글이 맨 앞에 떡 배치되어 있고 그다음 글이 내 마음속에 '김혼비'라는 이름을 깊이 새겼던 '루브르 언니'의 칼럼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였다. 아니, 이 책의 편집자는 귀신이거나 김혼비의 왕팬이 틀림없구나(귀신과 편집회의를 하는 건 여러 모로 어려울 테니 그냥 왕팬이겠구나).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사전을 보고 울었다는 김혼비' 이야기이다. 하는 일마다 안 풀리고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해 보이던 시절 엉뚱하게 사전을 들춰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 도착적인 상황은 '쓸모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기 마음대로 확장함으로써 - '쓸모 있다'는 띄어 쓰고 '쓸모없다'는 붙여 써야 문법에 맞는데 그건 '쓸모 있다'는 말보다 '쓸모없다'는 말을 쓸 일이 세상엔 더 많은 거야! 나만 쓸모없는 게 아니야! - 읽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웃음을 전해준다. 김혼비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마침 거기에 맞는 소재를 만나면 얼마나 인상적인 글을 쓸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가다.  김솔통 글이 그렇고 사전 이야기(정식 제목은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가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작고 하찮은 것에서도 늘 새로운 깨달음을 건져 올리는 김혼비야말로 거기에 딱 맞는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김혼비가 미니멀한 세계에서만 헤매는 작가는 아니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했던 김혼비에게 새벽 5시에 찾아와 화장과 헤어 스타일을 만들어주던 동료 네 명의 일사불란한 작업에서는 우애와 연대가 주는 기이한 감동이 있고, 주성치 팬클럽에서 만난 친구들과 오우삼 왕가위 두기봉 관금붕 들의 작품 세계를 두고 불을 뿜는 장면에서는  '오타쿠 김혼비'의 면모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무엇보다 '혼비'라는 필명 자체가 축구와 음악에 미친 소설가 닉 혼비에서 따온 것임을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시기를 지나는 중이다. 2년 전 이맘때는 언제든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할 수 있고, 퇴근 후 친구들과 만나 아무튼 술을 마실 수 있고, 주말에 훌쩍 떠나 전국축제자랑들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 글은 이 책의 에필로그 첫 문장인데 코로나 19 상황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쓴 책 제목들을 능청스럽게 한 문장 속에 배치하고 있다. 이게 김혼비의 능력이다. 그의 글이 힘이 센 이유는 통찰력이라는 선물 박스를 유머라는 트럭에 싣고 달리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많이 웃었던 문장은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에서 환경오염 문제를 거론하며 '그중에서도 산성비는 불벼락, 귀싸대기, 슬픈 예감 등과 함께 절대 맞아서는 안 될 무서운 존재였다'였는데, 배지영 작가가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차마 읽어줄 수 없었다고 리뷰에서 고백했던 -  뭐랄까, 전희도 후희도 없이 삽입만 있는 섹스 같은 느낌이랄까 - 같은 발랄한 표현들도 절대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명문장이다.


뭐든 잘하고 어디서든 사랑받았을 것만 같은 김혼비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가 팀장에게 미움을 받아 괴로워하던 시절  친구가 집에서 끓여준 사리곰탕면을 먹고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던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 무너져 있던 마음  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같았다......'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나도 왈칵 눈물이 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정다감' 아니고 소감일까. 다정다감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느낌이 드는데 소감으로 낮추니 뭔가 결락이 생기면서 그대로 '김혼비스러움'으로 변한다. 김혼비는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항상 '없음'이나 '부족함' 먼저 주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정소감이라는 제목은 '다정해  적이 있는 김혼비의 소감' 준말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책을 읽어본 나의 소감은 이렇다. '이불속에 누워서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불량식품을 혼자 먹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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