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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17. 2022

당근 하러 갔다가 채찍 맞은 이야기

당근 거래에도 요령이 있더군요

지난주부터 청주로 내려와서 글을 쓰고 있다. 사실은 아직 글을 못 쓰고 있다. 그렇다고 아주 안 쓴 건 아니고……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주말에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 진행 때문에 서울로 올라갔다가 하룻밤 자고 다시 청주로 내려와 짐을 풀었다. 아내가 싸준 반찬들과 코르덴바지, 노트북 등을 챙기다가 아이폰 젠더를 빼놓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내가 있는 집은 와이파이 신호도 약해서 스마트폰 전원이 나가 버리면 그냥 세계와 단절인데.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젠더를 택배로 보내 달라고 하면 야단을 맞거나 걱정을 살 것이다. 귀찮다고 안 보내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청주에서 저렴하게 밥도 먹여주고 물심양면으로 나를 보살펴주는 인문학 공동체 ‘해인네(해성인문학공동체)’ 선생님들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청주 아무 데나 가서 아이폰 제품을 제꺼덕 살 자신도 없었다. 그래, 당근이 있었지!


서울에서는 아내 심부름만 하고 직접 당근 거래를 해보지 않았으니 청주에 와서 개시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근 앱에 들어가서 지역 설정을 하고 ‘아이폰 젠더’ ‘아이폰 충전기’ 등을 검색했다. 아이폰 충전기를 9,000원에 내놓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환호작약하며 당근 채팅을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5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좀 멀긴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마트폰 전원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뭔가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언제 거래가 가능하냐고 묻길래 당장이라도 괜찮다고 했더니 6시 10분이 어떠냐고 했다. 내가 저녁을 먹을 생각으로 조금 더 늦출 수는 없느냐 물었더니 8시 40분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이에 자신이 학원에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걸 보니 학생인 것 같았다. 8시 40분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다시 6시 10분을 택하고 그 시간에 신협 건물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검은색 파카에 모자를 쓴 남자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지도 앱이 시키는 대로 버스정류장으로 달려서 버스를 탔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버스엔 사람이 많았다. 퇴근시간이 다 돼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요다에서 펴낸 김동식 작가의 작법서 『초단편 소설 쓰기』를 건성으로 휙휙 넘기며 정류장 표시를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제대로 내렸고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약속 장소 근처에서 지도 서비스를 켜고 신협을 찾았다. 좁은 골목길을 뺑뺑 도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나마  30분 넘어 일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신협 건물을 찾으니 허무했다. 그냥 가로질러 오면 훨씬 빨랐을 텐데 지도 서비스 안내를 곧이곧대로 따라 하느라 괜한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협 안으로 들어갔을 땐 더 큰 허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일찍 도착해 신협 ATM기 있는 곳에 들어와 있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무심코 그 위에 있는 대화창을 쳐다보니 출발 직후 거래자가 내게 보낸 메시지 내용이 보였다. ‘죄송해여 거래 안할게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검은 파카고 검은 모자면 조금 위험하고 더 늦은 시간을 원하시기도 했고 죄송해요 다른분 알아보시는게 좋을것같습니다'


황당했다. 당근 거래에 익숙지 못해 대화창을 다시 확인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나는 이런! 이란 감탄사를 보낸 뒤 어떡하냐고, 겁나면 친구나 어른과 함께 오셔도 좋다는 간곡한 메시지를 다시 보냈으나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가 5시 40분경이었으니 그래도 혹시 몰라(거래자가 학원 가기 직전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뒤늦게 마음을 돌려 다시 거래를 하러 올 수도 있으니) ATM기 앞에서 김동식의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셨다. 나는 책을 읽다가 "저쪽으로 갈게요."라고 말씀을 드렸고 아주머니는 "고마워요." 하며 웃으셨다. 아무리 걸레질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도 거래자는 답이 없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고지식하게 서서 계속 책을 읽었다. 김동식은 정말 친절하고 욕심 없는 작가였다. 자신의 창작 노하우를 하나도 숨김없이 아주 자세히 털어놓고 있었다.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고 반전을 만드는 방법까지 읽었을 때 거래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자기는 지금 친구 집에 있고 거래를 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죄송하다고는 하고 있지만 그리 죄송한 느낌은 아니었다. 채팅창의 글자들이 왠지 얄미워 보이는 게 그 증거였다. 순간 '당근과 채찍'이 생각났다. 모처럼 당근 거래를 하러 왔다가 고등학생에게 채찍으로 한 대 맞은 격이란 생각을 하니 바보 같이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나는 신협 맞은편에 있는 휴대폰 하우스로 들어가 휴대폰 충전기를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보다 먼저 내 스마트폰을 좀 충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우스 직원은 친절하게 내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아 주었고 아이폰을 노트북에 꽂아  충전할 수 있는 케이블도 내놓았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삼천 원인데, 저희 가게가 새로 오픈하고 해서 이 정도는 당근 후기만 잘 써주시면 그냥 드립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또 당근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이 급하니 일단 화장실에 다녀와서 후기를 쓰겠다고 말했다. 점원은 물론 그래도 된다고 말하며 공손하게 화장실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나와 가게로 돌아온 나는 당근 앱을 켜고 가게 이름을 쳐 넣은 뒤 후기를 작성했다. 새로 생긴 가게라는데 직원들이 너무 친절하고 좋은 가게라고 썼다. 화장실을 쓰게 해 줘서 고맙다는 얘기도 썼다. 아래에 사진을 찍는 곳이 있길래 사진도 한 장 찍어 올려야지, 하고 카메라를 켰는데 가게 로고 밑에 있던 남자 직원이 너무 뚱뚱하게 나온 것 같아서 사진을 지우고 다시 찍는 과정에서 스마트론 작동이 멈췄다. 에러가 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앱을 다시 구동시켰다. "썼던 후기가 다 날아갔네요. 어떡하죠?"라고 내가 울상이 되어 물으니 친절한 직원은 '간단하게 쓰셔도 된다'라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시 후기란에 들어가 '친절한 가게라 좋았다, 번창하시라'라고 간단하게 쓰고 스마트폰 케이블을 움켜쥔 채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대통령 후보 부인의 녹취록 방송 얘기로 잔뜩 시끄러울 텐데 나는 청주에서 당근으로 채찍이나 맞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한심함의 게이지가 더 높아지는 것만 같았다. 숙소로 가는 버스를 집어타고 스마트폰을 켜서 당근 얘기를 마구 쓰다가 멈췄다. 첫째는 스마트폰에 '로우 배터리' 표시가 떠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다가 또 내릴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두려워서였다. 숙소로 돌아와 약간 진정을 한 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동네 친구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배가 부르다고 했다. 내가 당근에 얽힌 실수담을 빠르게 개요만 전하고 스마트폰 케이블을 공짜로 얻어왔다고 했더니 아내는 "그건 잘했네."라고 칭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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