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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01. 2022

통영에서 감독과 함께 영화를 보던 날

정승오 감독의 《이장》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서호시장으로 가서 시락국으로 점심을 먹고 세병관에서 젊은 국악인들의 음악회 리허설을 보았다. 그리고 각자 가져온 책을 읽다가(나는 전날 전자책으로  채사장의 인문 에세이  『열한 계단』을 샀다) 차를 몰고 온 이동열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는 섬 전문 여행사를 창업한지 12년 된 사업가이자 활동가였는데. 통영에서  ‘섬마을영화제’를 만들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함께 온 하은숙 선생과는 부부였다. 하 선생은 지금 살고 있는 욕지도가 고향이고 대학에서 이동열 대표를 만났는데 다시 돌아와 거기서 고구마 등 작물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우리 부부가 갑자기 통영으로 오게 된 것은 이 대표와 최정희 선생의 인연 덕분이었다. 원래는 최 선생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건데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우리가 선생의 숙소와 프로그램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매력적이라도 영화를 보러 가는 게 먼저였다.

영화 상영 장소인 해솔찬농원 가는 길은 벚꽃이 만발한 환상의 꽃길이었 다. 이 대표 부부는 지금 이 길을 지나는 것은 복 받은 일이라 했다. 농원은 꽃과 나무와 오솔길, 오두막, 벤치 잔디 등이 잘 어우러진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농원 대표가 8대째 그곳을 지켜오고 있고 본인이 학교에서 일할 때부터 60년 동안 가꾼 정원이라는 설명을 듣고 둘러보니 더 감동적이었다.

원래는 야외 상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에 다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통영의 싱어송라이터 숨의 간단한 공연 후 저녁 7시부터 영화 《이장》의 상영이 시작되었다. 영화 시작 직전 이 대표가 “저기 빨간 모자 쓴 사람이 이 영화를 만든 정승오 감독”이라고 알려주었다. 전에 극장에서 예고편을 봤을 때 재밌겠다 생각했으나 결국 놓쳤던 작품이었다. 영화는 예상대로 재밌었고 생각보다 잘 만든 작품이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네 자매와 아들 하나가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야 하는 ‘이장’이라는 이벤트 덕분에 만나게 되는 스토리를 가진 이 영화는 징글징글한 가족 관계와 뿌리 깊은 가부장제, 남아선호 이데올로기,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복잡하고 쓸쓸한 사연들이 로드 무비 형식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뛰어났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오버’를 하지 않고 절제와 생략의 묘를 보여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후반부에 다섯 남매가 마루 끝에 앉아 비 오는 걸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그즈음 우리가 앉아 영화를 보는 상영관 지붕에도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이나현 모더레이터가 진행한 감독과의 대화에서 내가 영화 잘 봤다고 인사를 하고 시나리오나 대사 구성이 뛰어난데 특히 좋아하거나 영향받은 감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정승오 감독은 독일의 한 감독(들었는데 누군지 잊어먹었다)과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얘기를 했다. 이밖에도 영화 안팎으로 있었던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들이 넘실거렸다. 첫째의 아들 동민으로 나왔던 아역 배우의 연기력이 화제였고 둘째로 나왔던 이선희 배우 얘기도 했다. 원래는 술동이를 던져서 깨는 인물이 넷째였는데 둘째 역의 이선희 배우가 아이디어를 내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이선희 배우가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 감각 있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밤에 아내가 그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박윤석 배우가 댓글을 달았다. 그 이선희 배우가 자신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러키 역을 한 박윤석 배우한테 홀딱 반한 이후 우리는 그와 페친이 되었고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했으며 사무엘 베케트의 또 다른 연극 《엔드 게임》 그리고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등 그가 출연한 연극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행사가 모두 끝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주최 측에서 호텔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마련해 줘서 우리도 탔는데 마침 정승오 감독과 이나현 PD가 같은 방향이라 반가워하며 차 안에서도 계속 영화 얘기를 하며 갈 수 있었다. 이 PD는 “섬에서 태어나 섬을 잊고 살았던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꿈처럼 섬을 떠올리며 추억하다가 섬으로 들어가고, 깨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영화제를 풀어가는 게 힘들면서도 즐겁다고 말했다. 내년에도 또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헤어졌다.


숙소인 스탠포드호텔에 도착하니 11 가까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호텔 투숙 기록  가장 늦은 시간에 하는 체크인이  같다며 웃었다.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 통영까지 와서 해산물은 물론    못하는  말이 되느냐며 편의점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했으나 아내가 편의점은 11시까지만 운영을 하고 다른 데는 너무 멀어  수도 없다며 그냥 포기하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11 15분이었다. 섭섭하고 화가 났지만   없었다. 아내는 침대에 누워 통영트리엔날레 주제관 티켓 예매를 하느라 애를 썼고(모바일로 예매를 해야 했는데 결제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나는 전자책을 읽다가 졸려서 화를 내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시가 넘어 잠이 들었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 호텔 조식을 많이 먹고 커피를 마셨다. 스크램블드 에그가 없어서 조금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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