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선배의 한심한 결혼 축사

어른들 말씀을 듣지 말라는 축사를 하고 왔습니다

by 편성준

오늘 친한 후배의 결혼식에 가서 축사를 하고 왔습니다. 신랑 신부를 위해 제가 준비한 글은 '어른들 말씀을 듣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전 목사님의 주례사와는 아주 상반된 얘기라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준비한 대로 진행해 버렸습니다. 다행히 신랑 신부가 아주 좋아했고 하객들도 열심히 들어주는 눈치였습니다. 준비해 간 축사는 신부에게 주고 왔습니다. "다 진심이었어. 어른들 말씀 듣지 마."라고 한 번 더 강조하고 왔습니다(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을 썼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여

축하해주러 오신 결혼식의 주인공,

신부 인주 씨와 꽤 친한

어느 선배의 공처가 남편 편성준입니다.

광고 카피라이터로 오래 일을 하다가

이젠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사람이죠.

일전에 인주 씨가 '내가 결혼을 하니 축사를 한 마디만 해 달라' 부탁을 하길래 그러마 하긴 했지만,

잘난 것 없는 제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 사나흘 고민을 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끄럽게 꾸며낸 좋은 말 대신

제가 진심으로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뚝배기 같은 말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지인주와 호제영 두 사람보다

먼저 결혼 생활을 시작한 선배이고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두 사람에게

제가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말라’입니다.

보통은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우리 곁에 계신 어른들도

불과 몇십 년 전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분들도 결혼이 처음이었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사회에 나가 세상 쓴맛 단맛 다 보는 것도 처음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두 사람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어른이 되었죠. 그런데 이 분들의 경험과 깨달음이 모두 진리일까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항해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가자마자 난파를 당해 표류를 거듭하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표류만 경험한 사람에게 제대로 된 항해 경험을 들을 순 없겠죠. 어른들이라고 해서 모두 정상적인 항해를 한 분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른들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하지 말고

다만 ‘참고만 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의 경험이 아니라 두 사람의 생각입니다. 앞으로 두 사람이 살아갈 날들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겁니다. 그때마다 타인의 말에 현혹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과 양심이 시키는 본성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훨씬 믿을 만하고 다른 곳으로 책임을 돌리지 않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해주고 싶은 말씀은

‘부부일심동체’라는 고언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이고,

심지어 결혼을 했다고 해도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것뿐입니다.

결혼은 인격체끼리의 약속이요

평생 수행해야 할 계약이니

무조건 일심동체가 되었다고 뭉개지 말고

숟가락 젓가락 짝 맞춰 보듯

천천히 하나하나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그리고 ‘너는 너, 나는 나’라는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진정으로 서로 위하고 도울 수 있는 겁니다.

괜히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동시에 당황하거나

동시에 걱정에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씀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절대로 절대로

오늘의 기쁨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지인주 씨는 대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내는 벤처사업가입니다.

호제영 씨 역시 착실하고

독립심이 강한 경영인입니다.

지금 두 사람의 자세와 추세로 보면

당신들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세상을 잘 살아갈 게 틀림없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창 열심히 일 할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착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에 중독되어버리면

스스로 청교도적인 생활을 만들 수도 있겠죠.

지인주 씨와 호제영 씨는 제발

말라빠진 토스트를 씹으며

엑셀을 작성하는 일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모든 일은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를 위한 것이고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까, 를 위한

사업임을 잊지 마십시오.

보이지도 않는 내일을 위해

뻔히 보이는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배에게 한 마디 하라고 했더니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는다고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래도 오늘 드린 말씀은

다 진심에서 우러난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른들의 말씀을 듣지 마십시오.

부부일심동체라는 기만을 잊으십시오.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슬기롭게 사랑하고

다정하게 서로를 돌보며 사십시오.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2년 4월 2일.

두 분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편성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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