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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n 21. 2023

덕질을 덕질한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중


돌이켜보면, 늘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때로는 분위기 돋우는 작은 촛불처럼 은은하게, 또 어느 때는 주체할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그건 아마도 우주 속 한 톨 먼지만큼도 되지 않을 이 지구별에서,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존재의 '보잘것없음'에 지쳐 무너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고 이곳에 단단히 뿌리내리며 살아가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원 시절 같은 (개나리) 반의 얼굴 멀끔하고 유난히 똑똑했던 한 남자아이를 흠모(?)하면서 시작된 나의 다채롭고도 중구난방인 덕질은, 문구, 지경사 '소녀 명작 소설' 시리즈를 거쳐, 해문출판사의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 <로드쇼>와 <스크린>을 위시한 각종 영화잡지 수집, <로마의 휴일>과 <아라비아의 로렌스>등의 고전영화 파기에 이어 배우 필모 깨기를 돌고 돌아 아이돌 덕질에 이르기까지, 세월과 함께 변해온 내 모습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역사를 이어 왔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는 덕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관련된 책들을 하나하나 즐거운 마음으로 소화시켜나가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누군가(무엇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토록 타인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마음들이 써 내려간 글들이 얼마나 맛깔나고 사랑스러우며 반짝이는 에너지로 넘치는지를.


내 맘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멋진 덕후들의 빛나는 이야기들

시작은 ‘아무튼’ 시리즈였다.

어느 날, 브런치 작가이며 나의 글쓰기 선배인 한 지인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게 아무튼 시리즈의 '스릴러 편’을 추천해 주었다.

누군가 책을 추천해 주면 대개는 얼마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 후 해당 책을 빌리거나 사 보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그때의 나는 '이건 꼭 사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고, 녀석들과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로 해당 시리즈 중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야를 다룬 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이사 온 손바닥만 한 책들은, 지금 덩치를 불려 가며 책장의 여유 공간을 착실히 침범해가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저자의 덕질 연대기를 담은 이야기들도 사이좋게 자리를 나누어가고 있다. '덕질하는 그 마음' 자체를 사랑스럽게 내보여주는 책들이.



덕질의 역사를 살고 있는 저자들은 말해준다.

때론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고 간절해 진창을 뒹굴며 절망할지라도 결코 그 마음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에 결코 놓치지 않는 '희망'과 '행복'을 곁에 두고 생을 살아나가겠다고. 혹여라도 지금 현생에 치여  '좋아하는 마음'을 잊은 채, 하루하루 바스러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면 나와, 이 마음과 함께 하자고. 당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나 자신이 누군가의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티켓팅에 실패했다고 세상 다 끝난 사람처럼 대성통곡하거나, 미국이나 유럽까지 콘서트를 보러 가는 이들을 보면 '저건 조금 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아낌없이 길어 올리는 그들의 순수한 열의를 목도하며 무릇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상처받기 싫어서 늘 애정하는 마음에도 조금의 공간을 남겨두려 애쓰는 나의 이 어쭙잖고 얄팍한 마음이.

그들의 어여쁜 마음을 접하면 접할수록 나도 더 행복해짐을, '생의 아름다움'과 나를 끌어올려주는 '반짝이는 힘’을 느낀다. 생존이라는 구덩이 속 거친 흙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내게 손 내밀어 파란 하늘과, 푸른 숲과, 맑은 공기 속으로 이끌어 주는 그들이 그 마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열렬히 응원하고 싶어 진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었던 절망적인 나치 수용소에서도, 면도를 하고 양치를 하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려 애쓰던 사람들이 끝내 살아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덕질은, 덕질하는 마음은 그러한 '생존'을 넘어 우리를 '생동’하게 한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연명하며 의학적으로만 생물이라 지칭되는 존재가 아닌, 거침없이 나아가고 사랑하는 '진정한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아름다운 에너지를 끊임없이 충전해 준다.



덕질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내 마음을 춤추게 한다. 그들이 품고 있는 ‘행성의 아우라’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고 싶게끔 만든다. 자꾸만 과거로, 미래로 내달리려 하는 내 마음을 지금, 이곳에 단단히 붙들어준다.

그들이 있기에 더 따뜻한 세상이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들을 더 많이, 흘러넘치도록 보고, 느끼고, 만지고 싶다. 그 마음들을 그러모아 내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가고 싶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에게는 신기하리만치 열정 가득한, 무엇인가에 아낌없이 애정을 쏟아붓는 '멋지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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