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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01. 2023

아이와 함께 다큐멘터리 <수라>를 보다

“인간은 지구에게 왜 이렇게 못된 짓들을 하는 거야? 지구가 오래 살려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겠어!"


비를 뚫고 먼 길을 가서 본 다큐멘터리 <수라>에 관한 아이의 분노에 찬 한 줄 후기다.

최근 갯벌과 갯벌이 보듬고 있는 생태계에 빠져있는 아이는 <수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감정이입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단 내 아이뿐이겠는가. 어쩌면 이 지구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 간절하게 빌고 있을지 모른다. '제발 이곳에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저 오만불손한 생명체들을 사라지게 해 달라.’라고.



'비단에 새겨진 수'라는 뜻을 지녔을 만큼 아름다운 갯벌인 '수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파괴된 군산의 갯벌 중 가까스로 살아남아있는 유일한 곳이다.

전 세계에 6000마리도 채 남아있지 않아 멸종위기종 1급으로 분류되는 저어새 무리가 서식하고, 황홀한 바람소리를 내며 도요새들이 환상적인 군무를 추는 곳. 지난 10년 간 매해 평균 150여 종, 25만 2500마리가 넘는 새들이 오고 가며 자손을 키우고 생명을 이어간 곳. 이곳이 바로 '수라'이다.

그런데 마지막 남아있는 수라마저 개발을 빙자한 인간들의 무자비한 욕심에 머지않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1991년 노태우 정권 때 시작한 새만금 간척사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움트는 아름다운 수라의 모습


검은 머리갈매기가 덤프트럭이 오가는 공사 현장에서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새떼들은 근처 미군 기지로 회황하며 굉음을 내는 거대한 전투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날아간다.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터전. 그마저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기기들에 의해 수시로 위협받는 이곳에서 여린 생명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텨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황윤 감독이 새만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2003년이었다. 그러나 2006년 대법원이 새만금 간척사업을 강행하는 정부의 손을 들어준 직후 벌어진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이곳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잃었었다.

그녀가 다시 갯벌로 마음을 돌린 건 2014년 군산으로 이사를 오면서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7년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제공한 방대한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수라'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남기며, 수라갯벌 지키기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다큐에 함께 출연하는 오동필 씨의 말처럼, 황 감독은 수라의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을 본 죄'로, 이제 더 이상 수라가 그녀의 삶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듯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방조제 공사가 완성된 직후 갯벌 속 그 수많던 생명들은, 마치 섬으로 굴 따러 간 엄마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아이처럼 바닷물이 여느 때처럼 밀려들어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다.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밀물은 소식이 없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꼭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무도한 인간이 그들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바닷물을 막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갯벌의 생명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살아온 바다는 이전에 단 한 번도 그들을 배신한 적이 없었기에. 그랬다. 바다가 생명들을 저버린 게 아니었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결국 바다를 다시 품어보지 못한 갯벌은 죽음을 앞둔 병자처럼 말라가기 시작했다.


방조제 건설 이후 시커멓게 병든 강과 죽음을 맞은 갯벌의 생명들


그러던 어느 날, 갯벌 위로 흥건히 물이 차올랐다. 갯벌의 생명들은 간절히 기다렸던 바다가 그들을 다시 찾아온 거라고 일말의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다. 역시 바다는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고통의 시간을 버텨낸 그들은, 반가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임 없이 마지막 힘을 다해 갯벌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기다린 소금을 머금은 바다가 아니었다. 인간의 목을 축여줄 '비'일 뿐이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과 믿음을 배신당한 수많은 갯벌의 생명들은, 바다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의 터전 위에서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채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흡사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시체 무더기들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 그 이상의 것을 전해주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후로 전보다 나은 삶을 사는 이는 이곳에 없어 보인다. 단 한 사람도. ‘인간을 위한다'는 핑계로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으며 개발된 그곳은, 그저 방조제에 갇힌 강물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갯벌을 생명줄로 여기며 삶을 이어가던 어민들은 갈 곳을 잃고 병들어 가고 있다. 겨우 살아남아 수라로 몰려든 생명체들마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인간은 수라에 '공항'을 짓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 자그마한 국토에 이미 15개의 공항이 있다. 그중 10개는 승객이 없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군산에는 이미 하나의 공항이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또 다른 10개의 공항을 더 - 그중 하나를 수라에- 만들겠다고 한다. 이렇게 상식을 넘어 선 무자비한 계획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수라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이들은 황 감독처럼 죄인의 마음이 된다. 앞으로 그 아름다움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무거운 형벌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진다.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드는 순간, 엔딩 크레디트가 처연히 올라간다. 수라가 품고 있는 생명들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이름들이 어쩐지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들과 겹쳐 보인다. 앞으로 수라에서 사라질 생명체들을 나열한 것만 같아 어여쁜 이름들에 가슴이 아려온다.



황윤 감독은 말한다. 군산의 수라를 넘어 전국의 지역마다 있는 수라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울산의 태화강, 제주의 강정, 함양의 지리산... 이 작은 땅 곳곳에서 병들어가는 대지와 물과 생명들에게로 관심을 호소한다.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인구에도 인간은 출산율이 하락한다며 지구가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으로 인해 생명을 잃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도대체 인간은 지금 다른 생명체에게,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이 상황이 나아질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아이의 말처럼 이 비극이 해결되기 위해선 정말 인류의 종말이 라도 와야 하는 것인가… 수라를 보고 난 내 마음이 자꾸만 비장해진다.


“엄마, 나쁜 사람들이 저 짓(!)을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를 보며 아이가 목소리를 높여 묻는다.

무거워진 마음의 나는, ‘새만금 신공항 기본계획’ 취소 서명에 겨우 내 이름 석자를 올린다. ‘성인 인간’이라서 미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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