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뉴 Sep 12. 2023

소년에게서 위안을 얻다

나의 취향은 변태적일까?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내가 즐겨 듣는 곡이 있다. 카치니(Caccini)의 '아베 마리아'.

2003년 겨울에 방영한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시청한 이들이라면 이 곡이 익숙할 것이다. 주로 주인공(권상우, 최지우 등)들이 거리를 뛰어다니는 장면에서, 강렬한 드럼 비트와 함께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종종 등장했기에.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실로 다양한 변주들이 있지만, 개중 나의 최애는 영국의 소년 합창단인 '리베라'의 메인 보이 소프라노이자, 전설적(94년생에게 붙이기 어색한 단어이긴 하지만, 실제 '리베라'의 팬들에게는 그러한 인물로 여겨진다) 인물로 불리는 '톰 컬리(Tom Cully)'가 부르는 버전이다.



톰 컬리 버전의 '아베 마리아'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나는 그의 노래를 불면의 밤, 이불속에서 하염없이 뒤척이다 수면에 도움에 될만한 곡이 없을까 유튜브를 뒤적이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천상에서나 들려올 법한 노래였달까!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년의 맑고 아리따운 목소리에 온 청력을 기울이던 그 순간 나는 생각했었다. 먼 훗날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 이 곡과 함께 평화롭게 생을 마감해도 좋을 것 같다는. 그 정도로 소년의 노래에는 내 마음을 경건하게 뒤흔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https://youtu.be/bAULcisUEGw?si=TLoBZqputjdkH23L

톰 컬리가 부르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내가 보이 소프라노의 노래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은 초등(국민) 학교 졸업반 무렵이었다. 당시 음악에 조예가 있었던 담임 선생님께서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을 소개해 주셨는데, 처음 듣자마자 나는 그들의 노래에 반해버리고야 말았다. 그즈음엔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합창단의 주 멤버였는데, 선생님이 들려주신 노래를 들으며 우리 반의 천방지축 말썽쟁이 남자 급우들과 비교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우연찮게 보게 된 영화 <태양의 제국>에서 당시 아역이었던 '크리스천 베일'이, 극 중 교회 합창단원의 일원으로서 웨일스 민요인 '수오강'을 부르는 장면을 보고 보이 소프라노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크리스천 베일의 외모가 큰 지분을 발휘했던 듯하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아이가 노래도 저토록 아름답게 부른단 말이야?! 이러면서... ^^ 당시에는 대역의 목소리일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이렇게 파리나무십자가에서 크리스천 베일로 이어지던 보이 소프라노에 대한 내 애정의 역사는 빈소년 합창단, 리베라 소년합창단을 거쳐 보이 소프라노 개개인의 음반을 사는 데까지 이르렀다.

영화 <태양의 제국> 중 크리스천 베일(가운데 노래 부르고 있는 소년)이 보이 소프라노로 분연한 장면

확실히 보이 소프라노에게는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신성 하면서도 애틋한 느낌이 있다.

이러한 점은 교회음악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회 성가대에서 보이 소프라노들이 소프라노의 음역대를 맡았다. 엄연히 남녀차별이 존재했던 당시, 여성이 성가대에서 활동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천사의 이미지를 환기시켰을, 어린이의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를 지닌 보이 소프라노는 교회 성가대원의 일원으로 사랑받았다. 그리하여 변성기 전의 소년들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은 교회음악에서 큰 역할을 부여받으며 빛을 발했다. (참고로, 가곡으로 유명한 슈베르트도 '빈 소년 합창단' 출신이다)



보이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청춘의 나날들이 떠올라 애틋한 마음이 일기도 한다. 너무도 아름답지만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한 남성의 일생에서 보이 소프라노의 음역을 지닐 수 있는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그 찰나의 시간, 천사의 목소리에 견줄만한 오묘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남성의 몸 안에 머무르다 가는 것이다.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자리 잡기 전 잠깐 동안 말이다. 마치 우리 생의 청춘의 시간처럼. 짧지만 아름답고 강렬한,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그렇기에 더 곱디고운 '화양연화'와도 같은 우리 기억 속 아련한 불멸의 시간처럼..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이리도 보이 소프라노의 노래에 집착하는 사실을 때론 감추고 싶기도, '내게 변태적 성향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지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쭉 이어져 온 변함없는 나의 취향이기에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라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독자들을 향해 이토록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소년 합창단의 공연을 못 본 지도 꽤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관람했던 게 코로나 이전인 3년 여전 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였으니. 쭈니의 손을 맞잡고 ‘이 녀석을 빈 소년 합창단 멤버로 키워내고야 말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슴에 품은 채 비장한 발걸음으로 먼 길을 갔었건만, 이런 엄마의 속사정을 알지 못했을 쭈니는 공연 시간 내내 노래보다는 빈 소년 합창단 형아들의 반들반들 윤이 나던 검정 구두에만 온통 관심을 보였더랬다. 역시, 자식은 내가 뜻한 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몹시도 독립적인 존재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스코틀랜드 국립소년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 출신인 '모래이 웨스트(Moray West)'가 부르는 모차르트 '마술 피리' 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추천하고자 한다. 소프라노들에게 난해하기로 유명한 그 곡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조수미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곡은 높은 음역대, 빠른 음의 흐름과 가사의 내용에 맞춘 복잡한 감정 연기가 요구되는 극강의 난이도로 유명한 아리아다. 그런데 이걸 열 살 남짓한 소년이 해낸다. 그것도 꽤 능숙한 솜씨로. 능숙하지만 기교적이지 않은 그의 청아하고도 매력적인 보이스가 청중들에게 그야말로 천상의 느낌을 선사한다.



마음의 정화가 필요할 때, 잠 못 드는 밤, 눈을 감고 귀와 마음을 오롯이 이 소년의 목소리를 향해 한번 열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마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의 대자연 속에서 청량한 바람을 마주하며 홀로 거니는 듯한, 때 묻지 않은 감성에 마음 깊이 힐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이 소프라노 ‘모래이 웨스트(Moray West)’

https://youtu.be/REP1u0rIWfs?si=8sGrt0jFZscfRski



매거진의 이전글 굼벵이 작가의 응원과 다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