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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13. 2023

내겐 흑색 소음, 엄마에겐 백색 소음

"야! 아이 씨이~ 이거 먹어!!"

타닥타다닥 거리는 스피디한 키보드 소리와 함께, 아이가 내는 격한 추임새가 거실을 울린다.

사실 추임새라고 표현했지만, 종종 귀에 거슬리는 비속어도 들려온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본, 혹은 그런 사람을 주변인으로 둔, 이들은 잘 알 것이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게임만큼이나 빠른 리듬으로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언어들이 게임을 할 때 필수품과도 같다는 것을.



아이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 채 제 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는 것보다, 열린 공간에서 하는 모습이 보기에 더 좋긴 하다. 그러나 혼잣말을 넘어 종종 소음이 되어버리곤 아이의 외침은 때때로 우리 부부의 제재를 당하기도, 조금 심하다 싶은 경우엔 꾸짖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집안을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다, 섬세한 청력을 지닌 아래층 이웃을 자극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어쨌든 저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에, 아이가 게임을 하는 시간만큼은 맘 편히 즐길 수 있게 놔두는 편이다.



짝꿍이 없던 휴일 오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날따라 아이는 게임을 하면서 열을 잔뜩 받은 건지 추임새를 넣는 목소리가 유독 요란했다. 자칫하면 중2병이 단단히 걸린 제 누나방까지 쩌렁쩌렁 울려 화를 돋울 것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스트레스 풀려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되면 어쩌냐?'라고 말하며, 목소리를 낮추거나 게임을 그만하라고 재촉했다. 가급적 부드러운 말투를 두르려 애썼으나, 내 말이 길어지는 것과 비례해 아이의 입은 점점 더 튀어나오고 표정은 구겨졌다.



그때, 어느새 나온 건지 주방 쪽에 서 있던 엄마가 끼어들었다.


  "그냥 놔둬라. 나는 쭈니가 내는 소리 듣기 좋더라."

  "안 시끄러워?"

  "응.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좋아."


그 순간, ‘엄마 청력이 나빠져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이 입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가뜩이나 하루하루 커져가는 나이 듦의 설움으로 마음이 쪼그라들고 있는 엄마에게, 내가 더 보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의 표정과 말투에선 어쩐지 단호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엄마에게서 듣기 힘든 표현을 불현듯 접한 내게 이런저런 생각이 잠시 머물다 갔다. 엄마가 말하는 '사람 사는 집'은 분명, '사람답게 사는 집', '온기와 정이 있는 집', '활기가 넘치는 집'일 것이다. 내게는 시끄러운 소음처럼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엄마에게는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백색 소음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아이의 소리에 귀를 열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 흐뭇하게 감상이라도 해온 사람 같았다. 그 말에선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향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70년 넘게 살아오면서 엄마에게 집이 '사람 사는 곳 같은 장소'로 느껴진 날들이 얼마나 될까.

시끄러운 아이의 입이 아닌, 그것을 제재하는 내 입을 다물게 만드는 엄마를 보며, 엄마와 '불편한 동거'를 버텨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언제 또 맘이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아빠가 세상을 등진 후 고향집에서 홀로 머무르던 엄마는, 고향에 계속 남을지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올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민했었다. 만약 엄마가 고향에 남았다면 딸과 사위와 갈등을 겪을 일도, 사춘기 손주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덜했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우리와 함께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는 마음보다 사람의 소리를 갈구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엄마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을까.



하루 종일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향집에서 더 폐쇄적인 삶으로 빠져, '사람 사는 곳 같은' 집을 그리워했을 엄마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람의 소리'가 외로운 개인의 삶에서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대상인지 알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어두운 자취방에 들어서며 TV부터 켜는 마음이,

홀로 작업을 하기 위해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를 찾게 되는 마음이,

아이가 내는 소음이 듣기 좋다며 흐뭇해하는 그 마음과 하나로 포개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떠나야 하는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청력인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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