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들과 휴일 오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의 첫 펀딩을 가장 반겨준 이들이기도 한 그녀들의 이름은 혜진, 그리고 혜정.
이번에 펀딩 한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델이자,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그녀들은,
실제로는 내가 예전에 몸담고 있었던 학교의 학생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이다.
지금은 서로 다른 지자체에 거주하고 있어 함께 얼굴 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랜선으로 서로의 소식을 전해주다 가끔 현실 세계에서 만나고 있다.
드물게 만난다고 해서 특별히 우리가 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그저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떤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만남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행위 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소식을 내게 전해주고, 나는 학교를 떠나 새로이 발 디딘 세상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다 이야기는 방탄 덕질로 수렴하곤 한다.
소설 속에서처럼 실제 혜정은 태형(뷔)을, 혜진은 정국을, 나는 지민을 가장 좋아한다.
사실 '가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멤버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덕질을 하다 보면 꼭 '최애'를 가져야 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다.
아껴 쓰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혜진이 이번에 큰맘 먹고 3개월 할부로 구입했다며, '위버*'에서 구입했다는 정국의 'Seven' 로고가 찍힌 회색 재킷을 자랑한다. 나머지 둘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재킷이 너무 고급지고 멋지다!'라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혜정은 핸드폰에 깔려 있는 태형의 온갖 사진들을 내보인다. 이번에는 또 다른 나머지 둘이 '태형이 너무 잘생겼다!'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고 보니 지민이를 향한 나의 덕질이 가장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순간 쓸데없이(?) 경쟁심이 솟아난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번 만남에는 나머지 둘의 감탄을 자아낼 만한 '덕질 무기'를 장착하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셋 모두 힘든 시기에 방탄 덕질에 빠져들었다.
그중 내가 가장 덜 고달픈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혜진과 혜정에게는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있었다. 내가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반면, 그들은 육체마저 병들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혜정은 과로로 쓰러지다, 가구의 뾰족한 부분에 머리를 부딪혀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운이 나빴으면 자칫 생을 달리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혜진은 학년부 회의 때 동료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기절할 정도로, 과도한 업무와 인간관계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힘든 나날들을 보내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방탄 덕질에 빠져들었다.
물론 저마 조금씩 다른 시기였지만, - 시기적으로는 내가 가장 먼저, 혜정, 그리고 혜진 순이다 - 우리 모두는 병원에서도 주지 못한 마음의 치유를 얻었다. 내가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다는 심경을 밝혔을 때, 혜진의 한 마디가 내게 이야기를 시작할 힘과 에너지를 주었다.
"나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써 봐!"
이렇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웃었지만, 실제 내 첫 소설의 주인공은 그녀가 되었다.
얼마 전 펀딩한 내 소설을 학교로 배송받은 그녀는, 요즘 동료들에게 자신이 소설 주인공이 됐다며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머쓱하면서도 조금 흐뭇해진다. 그녀의 힘든 시간에 조금이나마 선물 같은 위로를 줄 수 있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러자 이번에는 혜정이 내 책을 들이밀며 "작가님, 사인 부탁해~"라고 말한다. 이쯤 되니 표정 관리가 되질 않는다.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즉흥적으로 만든 사인을 휘갈기며, ‘나도 예쁜 사인 하나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맛있게 점심을 먹은 우리는 같은 건물에 새로 생겼다는 북카페로 이동해 2차 수다를 떤다.
지난번 만남에서처럼, 각기 다른 음료를 시켜 멋들어지게 사진도 찍어 본다. 어여쁜 빛깔의 잔들이 어쩐지 지금의 우리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수다를 이어가다 어느 사이엔가 혜진이 조용해진다. 나와 혜정이 학교 소식, 사회적 이슈, 육아의 힘든 점 등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 혜진은 푹신한 소파 한 귀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아기처럼 단잠에 빠져들어있다. 미소 지은 표정으로 꿀잠을 자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머지 우리 둘은 조용조용 대화를 이어간다.
카페 안의 커다란 엠프에서는 연신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로 적당히 들어찬 공간에는 듣기 좋은 백색 소음, 책이 풍기는 내음과 기분 좋은 커피 향이 가득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혜진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쭉 편다.
"우와! 이렇게 꿀잠 잔 거 실로 오래간만이다. 정말 달게 잘 잤어. 꿈까지 꾸면서 말이야."
"너, 한 시간도 더 잤어."
"정말?! 어쩐지 상쾌하네."
"우리 얘기 많이 나눴는데, 자장가처럼 들린 거야?"
"응. 덕분에 완전 잘 잤네. 원래 나 잠을 잘 못 자는데..."
어둠이 깊은 밤에도 잘 못 드는 잠에 이리도 달게 빠져들게 하는 이 만남이, 느슨하고 편안한 상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소설 속에서는 끊임없이 사건과 상황들이 펼쳐지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주인공들은 별 할 일 없이 여유롭게 나누는 이 시간이 즐겁고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