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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Feb 05. 2024

반려조들이 그리는 일상 풍경

우리 집에는 크기도 성격도 다른 세 마리의 새들이 동거 중이다.

암컷 모란앵무 자몽, 왕관앵무 수컷이자 볼터치도 어여쁜 망고,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마트에서 가져온 유정란에서 닭으로 성장한 '김치’라는 녀석이다.

예전 글을 보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처음으로 접하는 분들을 위해 이 아이들을 먼저 간단히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1. 자몽 / 암컷  모란앵무 / 연령: 3년 차

작은 체격을 지녔으나, 무기에 견줄만한 날카로운 부리를 가졌고,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만큼이나 성격이 지랄맞다. 셋 중 가장 똑똑하며, 상대방의 약점을 잘 파고든다. 특히 덩치 큰 '김치'를 대할 때, 김치의 약점인 발목 아래 부분을 공략해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새장 문을 여는데 도통해, 사람 가족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지라 애정 표현이 지나치다 못해,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질척거리는 경향이 있다. 파트너인 망고군과는 ‘전략적 밀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방 문고리(특히 사춘기 언니 방) 를 지키고 있는 것에 진심이다.

나는야 문고리 지킴이. 언니가 방밖으로 나올 때까지 이 문은 내가 사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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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망고 / 수컷 왕관앵무 / 연령: 상동

엄청난 식탐(사람 먹는 건 죄다 먹으려 든다)의 소유자이자, 상당한 기회주의자로 자신이 상대방을 필요로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기가 막히게 잘 구별한다.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몹시도 사회생활을 잘 해냈을 것 같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며, 대단한 사랑꾼이어서 때때로 사람 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마누라인 자몽양이 알을 낳을 때쯤이면 급격히 예민해져서, 평소와는 달리 근처에 얼씬거리는 사람가족에게 덤벼들다가 되려 역습을 당하기도 한다. 망고군이 집에서 가장 아끼는 공간은 부엌이다. 특히, 음식 냄새 솔솔 나는 저녁 준비 시간이면 전자레인지와 밥통 주변, 싱크대 위, 심지어는 불 켜진 가스레인지 근처를 적극적으로 배회하며 밥알 한 톨이라도 사수하려 든다.

이래 봬도 저, 책 좀 볼 줄 아는 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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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치 / 암탉(데칼브 앰버링크) / 연령: 5개월 차

큰 덩치에 비해 하는 짓이 깜찍한 편으로, 밥그릇 뒤엎는 것과 이불 위에서 헤엄치는 것을 좋아한다. 튼튼한 소화기관을 장착한 대식가로 가리는 음식이 없어, 바닥에 떨어진 사람 손톱 발톱마저 날름날름 주워 먹어 눈도 깜짝하지 않고 소화시킨다. 특히 초등학생 오빠가 먹는 '핫바'에 눈독을 들여 훔쳐먹는 데 여러 번 성공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싫어하는) 강한 자 앞에서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 강하게 구는 장면이 종종 목격되어 참교육을 빙자한 혼쭐이 나곤 한다. 눈치를 잘 보며,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면 타조와도 같은 속도감으로 (층간소음이 걱정될 만큼) 성큼성큼, 줄행랑치는 것이 특기다. 주인아주머니의 참교육 시간이 도래하면, 부리나케 주인아저씨 품으로 도망가 불쌍한 척 연기도 할 줄 안다. 닭치고는(?) 꽤 똑똑한 것으로 사려된다.

불과 얼마 전, 제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죠.


사람 아이들의 쫑알거림이 사라진 집의 적막함을 이제 새들이 채워준다. 휴일이면, '쫑알쫑알'은 '지지배배'가 되어 눈을 뜬 아침부터 해 지는 밤 시간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

'윙~'하는 청소기 소리가 물러간 자리에 제일 먼저 김치가 날개를 크게 한 번 푸드덕 거리며 들어선다. 김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몽이와 망고가 나오기 전, 안방에 있는 모이그릇의 모이를 맛보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있는 큰 모이통을 두고 굳이 자몽이와 망고의 밥을 훔쳐 먹는 것을 좋아하는 김치의 심리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밤늦은 시간 짝꿍의 야식을 종종 '한 젓가락 - 사실은 몇 젓가락 -' 슬쩍 훔쳐 먹는 것을 즐기긴 한다.



만족스러울 만큼 모이를 먹은 뒤 김치가 향하는 곳은 거실이다. 넓은 거실에는 김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컴퓨터 본체, 비닐로 되어 있는 쓰레기통, 널브러진 무릎담요 아래에 얌전히 숨어 있는, 폭신폭신한 빈백까지. 개중 김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깜빡깜빡, 무지개빛깔이 들어오는 컴퓨터 본체다. 김치는 마음에 드는 대상을 부리로 쪼고 또 쫀다. 결코,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는 부리를 들이대지 않는다. 이것만큼은 한결같다고 자부하는 것 같다. 사람 가족들이 경악하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자신이 싼 똥을 맛보는 것도, 자신의 건강한 똥이 사랑스럽기 때문일 거다. 컴퓨터 본체를 부리 끝으로 두드릴 때 들리는, '퉁퉁' 투박하면서도 웅장하게 울리는 소리가 김치 듣기에 썩 좋은 모양이다. 거실에서 2차로 흡족함을 맛본 김치는 그제야 베란다 밖으로 옮겨진 화분으로 시선을 돌린다. 김치에게 화분은 참새에게 방앗간 같은 존재다. 화분에 깔린 흙을 하루라도 맛보지 못하면 김치는 아마도 금단증상에 시달릴는지도 모른다.



그사이, 자몽이와 망고 커플이 뒤늦게 등장한다. 물론, 김치처럼 바닥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새장 문이 열리면, 마치 전투기 2중 편대가 스쳐가듯 머리 위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거실 어딘가로 매끄럽게 착지한다. 망고는 주로 거실 책장 위에 자리를 잡고, 사람에게 질척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자몽이는 적당한 빈틈을 보이는 사람 가족을 찾아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진다. 이때쯤이면 김치의 굵직한 '꼬꼬' 소리는 망고의 노랫소리와 자몽이의 울트라하이소프라노 음색에 묻히고야 만다.



자몽이와 망고 커플은 각자 편애하는 활동과 그에 따른 공간이 있다. 망고는 주로 거실 책장 위나 안방 옷장에 붙어 있는 거울 앞에 머문다. 약간의 나르시시스트 경향을 보이는 망고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기를 즐기는 듯하다. 또한, 책장 위에 놓여 있는 그림 주변을 맴돌며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리로 감상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자몽이는 끊임없이 종이를 탐한다. 주인아줌마 아저씨가 책을 많이 사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가 점점 전자책으로 갈아타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기를) 온갖 책들의 질감과 냄새는 자몽이의 하루를 즐겁게 해주는 엔도르핀과도 같은 존재다. 책을 잘게 찢어서 깃털에 꽂아 예쁘게 장식하고, 그러다 지루하면 바닥에다 종이를 흐트러뜨리는 장난도 치고, 그것도 재미없으면 구석에 숨어 있는 잡지나 팸플릿을 부리로 세심하게 끄집어 내 사람 가족들을 놀라게 한다. 현재 자몽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가족은 사춘기병 걸린 중학생 언니다. 질척거리는 자몽이가 귀찮다며 헐레벌떡 도망가는 언니를 자몽이는 절대 싫어하는 법이 없다. 언니가 황급히 사라진 방문 앞 문고리를 차지하고서는, 언니가 다시 나타날 순간을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때때로 자몽이와 망고 커플에게 '사랑의 계절'이 찾아오면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 계절에 사람 가족들은 다소 무심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불꽃 튀는 장면을 목격하며 혀를 '끌끌'차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선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칫 잘못하다간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징그러워!'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이 귀여운 아이들을 눈앞에 두고 말이다. 자몽이 망고 커플이 혹여라도 알아들으면 크게 상처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서, 못 본 척해주는 연기력이 필요하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행동하는 그런 능력이.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커플의 핑크빛 계절이 몹시도 자주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어린 김치에게선 이렇다 할 증세가 목격되진 않지만, 앵무새 커플의 '꽁냥거림'은 김치에게 적잖은 부러움과 시기질투를 불러일으켜, 올바른 성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아마도) 평생 수탉과 친분을 맺을 일이 없는 김치니 말이다. 사랑의 계절이 되면 자몽이 망고 커플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부리'와 ‘몸짓’인 듯하다. 먹이를 상대의 입에 정성스럽게 게워 넣어주며 어찌나 부리로 쪽쪽거리는지, 사람인 우리마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새들이 여러 마리다 보니, 녀석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서열 다툼이 발생한다. 얼마 전까지는 성격 드센 자몽이가 서열상 가장 우위를 점했다. 저보다 몇 배는 더 큰 김치마저도 눈치 보며 슬슬 기게 만들었던 자몽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김치가 거의 성체에 이르면서 전세가 역전되어가고 있다. 예전처럼 자몽이가 김치의 다리 아래를 공격하려는 순간이면, 김치는 그 큰 덩치를 들이밀며 '이 조그만 녀석이, 확!' 하는 태세로 겁을 준다. 한 번은 부리로 자몽이 목을 낚아채 공격하려다가 우리에게 들킨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잔머리 대왕인 자몽이도 이제 김치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동물이고 사람이고 체격 차이가 너무 나면 아무래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테다. 상대가 자신의 거대한 체격이 가진 이점을 잘 인지하고 있다면 더더욱이 말이다. 자몽이 곁에서도, 김치 앞에서도 기를 못 펴는 망고가 짠할 따름이다. 물론, 망고군을 대하는 자몽양의 태도가 사뭇 부드러워지는 그 계절이 돌아올 때면 상황이 일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사람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하루지만, 그러한 날에도 새들의 세상에는 '지겨움'이나 '지루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보인다. 새들에게는 아주 작은 차이로 매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같은 자리에서 새들은 그때그때 자신만의 새로운 일거리와 흥미로운 놀이를 만들어낸다. 문고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도, 거울 앞에 서 있는 순간도 그 자체로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나날들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 가족들은,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고서야 덩달아 즐거워하며, ‘하하호호' 묵혀왔던 웃음소리를 시원하게 토해낸다.



그래서이다. 하루에 십 수 번도 더 싸대는 똥을 치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녀석에게 시달리면서도, 때로는 날카로운 부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결코 이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만큼 삶에서 ‘웃음’이 가지는 힘은 크다. 게다가 아직은,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보다, 서퍼들의 가슴을 뛰게 할 역동적 파도를 밀어 올리는 바다가 더 좋기에. 재미없는 천국보다는 재미있는 지옥에 매력을 느끼기에.

지옥이라고 말하기엔, 이토록 웃음꽃이 피어나는 곳이기는 하지만..

김치의 관찰자적 시점 1: '이것들 붙어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김치의 관찰자적 시점 2: ‘모태 솔로 앞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앞으로의 나날들이 고달프겠구나.’ㅠ
(위로부터) 김치가 흙을 먹으러 화분에 다가가다가, 자몽이를 발견하고 움찔하지만 (좌) 자몽이가 뒤돌아 선 틈을 타 흙을 몰래 맛보려는 찰나 (우) 자몽이에게 발각된 후 줄행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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