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낯선 듯 낯익은 얼굴…. 그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들 가까이 다가가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내 입이 연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건 짧은 단어 같은 거였다. 목에 힘을 줘 소리를 내질러보려 했지만, 목만 아파올 뿐이었다. 침을 삼켰다. 뭔지 모를 비릿한 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무엇인가가 눈앞을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저절로 눈이 감겼고, 이내 심한 몸살을 앓을 때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들려오던 높고 날카로운 비명소리….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잠에서 깼다.
여름이 되면서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번 여름엔 유독 심하다. 할머니는 내게 병원에 한번 가봐야 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했다. 나는 괜찮다고, 이젠 익숙해진 일이라고, 할머니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참말이가?'라고 내게 묻는 할머니의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어쩐지 내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체육시간 후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눅눅한 공기에 찌든 땀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꺼운 것은 원래 그렇다 쳐도, 전에 없던 현기증까지 일곤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운암천 사건 이후부터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확신은 없다. 그 사건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단지 여름이라는 계절 탓인 건지.
고모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지방에 있는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고모는, 다음 주 내내 여름휴가라고 했다. 여름휴가 기간이면 고모는, 미야를 동반하는 1박 2일의 짧은 여행 기간을 제외하고 주로 이 집에 머무른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오랜 시간 밖에 있을 구실이 필요했다. 여름 방학이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어도 이곳을 떠나 어디론가 갈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내 상황을 알기라도 하듯 송이가 방과 후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름철 카페만큼 시원한 곳이 도서관이고, 책과 에어컨과 함께 하는 피서만큼 알뜰하고, 지적이며 훌륭한 피서도 없다고 주장하며.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은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나는 때때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는데, 도서관 내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 본 적은 없었다. 도서관 앞 트랙을 돌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을 때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는 하지만, 타인과 함께 도서관에 가 본 적은, 내 기억 상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송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책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남학생은 흔치 않을 거다. 그런데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송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와는 다르다. 송이가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 나는 책의 감촉을 느끼고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한다. 독서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책에서 나는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책을 펼쳐볼 생각을 잘하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를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활자보다는 그림이나 사진이 많은 것으로.
평일인데도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 대학생처럼 보이는 형, 누나들까지. 송이는 열람실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자연과학 서적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여행서적 코너에서 『베트남 일주하기』를 골라 들었다. 예전에 진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에는 진호의 고향 근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다. 진호의 말처럼 내 방에 붙어 있는 풍경 사진과 흡사했다. 책 속의 사진들을 봤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여행에 발을 들여놓은 듯 마음이 간질거렸다. 도서관 내에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것 같진 않았지만, 초록의 사진과 어우러지는 에어컨 바람이 평소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도서관을 적극 추천한 송이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잠시 후, 책을 한 아름 껴안은 송이가 서가 사이에서 나타났다. 개중에는 꽤 두꺼운 책도, 그림이나 사진이 많아 보이는 책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새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인 것 같았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송이의 표정이 해 질 녘의 가로등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여기 시원하고 좋지?”
송이가 물었다.
“... 응?”
환한 송이의 표정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너 더위 먹었냐? 어째 멍해 보인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별로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걸핏하면 피곤하냐, 너는?”
송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송이를 처음 만났던 날이, 텅 빈 교실에서의 어느 오후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짝퉁 넌 무슨 책 고른 거야?”
“이거….”
내 눈이 가려질 정도로 책표지를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베트남 여행 가게?”
어쩐지 송이에게서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언젠가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진호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진호가 잘 알 거 아냐?”
“그러게….”
“너는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왔어?”
내가 물었다.
“새도감들. 나 올 겨울에 탐조하러 가려고. 그러려면 미리 공부해 둬야지.”
송이가 신이 난 듯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댔다.
‘탐조’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다가, 슬그머니 핸드폰 창을 열어 재빠르게 ‘탐조’를 검색했다.
‘탐조-자연 상태에 있는 새들의 모습이나 울음소리를 있는 그대로 관찰 또는 관상하면서 즐기는 행위’
내 추측이 거의 들어맞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왜 혼자서 실실 웃고 그래?”
송이가 물었다.
“여기 시원하고 좋아서.”
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창밖을 바라봤다. 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는 키 큰 나무들이 바람 따라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지?!”
공감을 받은 기쁨을 느끼고 있는 걸까, 송이의 말끝이 경쾌하게 상승했다.
나는 책을 보다 눈이 답답해지면 창밖의 초록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뭇가지들의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어느 순간,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송이의 옆모습이 보였다. 송이는 눈앞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 갈매기 떼가 날아다녔고,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는 수많은 은빛 비늘들을 펼쳐 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옅은 바람이 불자, 금빛 가루를 입은 듯한 송이의 긴 머리칼이 갈대숲처럼 살랑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송이가 내 쪽을 돌아보며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조그맣게 움직이는 송이의 입술이 여리면서도 강인해 보였다. 그 입술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송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나 사고 싶은 책이 생각났어. 서점 같이 갈래?"
'서점'이라는 말에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아마도 지난번 송이의 제안을 거절한 후 미련스럽게 남아있던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미처 생각할 틈 없이 대답이 먼저 나와 버렸다.
우리는 도서관을 천천히 빠져나와 봉봉치킨 맞은편 동네서점으로 향했다.
한낮의 열기가 식어가는 거리를 송이와 둘이서 걸었다. 저녁이었음에도 7월의 햇살은 꼬리가 길었고, 내 등에는 금세 땀이 차올랐다. 송이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걸음을 내디뎠다. 도서관에서와 다르게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우리는 간간이 여름 바다와 숲과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점을 얼마 앞뒀을 때였다. 빌라와 빌라 사이 어딘가에서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송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멈춰 섰다. 그때 내 시야에 낯익은 오토바이 하나가 들어왔다.
“저거, 진호 오토바이 같은데…?”
내가 말했다.
“그래? 어떻게 알아?”
“저 무늬 보면 알 수 있어.”
나는 오토바이에 붙어있는 눈 모양의 문양을 가리켰다. 그러자 송이가 소리 나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고, 나도 속도를 실어 송이 뒤를 따랐다.
소리는 빌라 주차장과 야트막한 언덕 사이에서 나고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진호와 근수 무리가 보였다. 우리 쪽을 향하고 있던 진호의 얼굴이 잔뜩 상기돼 보였다.
“야! 너네 뭐 하는 거야?!”
아이들을 발견한 송이가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갔다. 근수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아봤다.
“넌 빠져! 우리 진지하게 대화중이니까.”
“진호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송이가 진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진호의 뺨이 부어 있었다. 진호는 우리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매만지며 부릅뜬 눈으로 다시 근수를 쏘아봤다.
“말로 하면 되잖아. 무식하게 왜 힘을 써?!”
송이가 격앙된 목소리로 근수를 야단치듯 외치자, 근수가 송이를 한 대 치려는 사람처럼 팔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고, 송이가 두 손으로 근수의 팔을 꽉 붙들자, 근수가 송이의 팔을 힘차게 뿌리치는 바람에 송이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너, 나쁜 사람이야. 그렇게 살면 안 돼!”
진호가 소리치는 동시에 근수의 주먹이 진호의 배를 향해 날아갔다. 진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새끼가 감히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 베트남 새끼 주제에 짜져 있을 것이지 어디서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야. 건방진 새끼가…!”
그 순간, 내 시야에 괴로운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 진호와 송이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왔다.
“야, 그만해라!”
내가 소리치자 근수 일행이 일제히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가 송이와 진호를 차례로 일으켰다.
“괜찮아?”
내가 송이에게 물었다.
“응…. 아무래도 쟤들 신고해야겠다.”
송이가 핸드폰을 꺼내드는 찰나, 근수가 송이의 핸드폰을 낚아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핸드폰이 바닥과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송이가 핸드폰을 줍기 위해 달려가는 동시에 진호가 머리를 근수의 가슴 쪽으로 세게 들이밀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근수가 진호의 등위로 주먹을 내리꽂자, 진호가 ‘윽’ 소리를 내며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근수의 팔을 오른손으로 힘주어 잡았다.
“이 새끼가! 옛정이 있어서 참고 있었더니 어디서 자꾸 하라 마라야! 그래, 이 베트남 새끼한테 동족 의식이라도 느끼는 거냐? 같이 아빠 없는 처지라서…?!”
“나 아빠 있어. 우리 아빠 한국 사람이야!”
근수의 말에 대꾸를 하려는데, 진호가 근수와 나 사이를 밀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좆 까는 소리 하고 있네. 븅신 새끼….”
근수가 기가 차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내 사진….”
등 뒤에서 송이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할 것처럼 끓어올랐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대로 있으면 머리가, 몸이 터져나갈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뒤의 상황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내 손과 근수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내 입에서 연신 거친 말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내 팔을 꼭 붙든 송이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 없지만 한 번의 싸움에서 주먹 한방으로 근수 코를 부러뜨린 아이. 그것도 모자라 몇 번의 주먹을 더 날린 아이. 아빠 없는 아이. 내숭 떠는 아이. 그리고 무서운 아이.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시선이 낯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담임선생님이 나와 진호, 송이를 함께 불렀다. 진호와 송이는 근수에 대한 비난을 하고 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다가도, 근수의 코가 부러질 정도로 내가 주먹을 휘두른 지점에 가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30여분 정도 얘기를 나눈 후 선생님의 지시로 진호와 송이가 먼저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이리저리 피하다 결국엔 시선을 내 발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엇이 신우 네가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을까?”
사실 조금 놀랐다. ‘왜 그랬어?’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선생님이 나를 힐난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선생님의 눈을 봤다. 선생님은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저 차분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살다 보면 주먹으로 패 주고 싶은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니지. 심지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인간도…. 쌤도 그런데, 신우 넌 오죽할까 싶다.”
“선생님도 정말, 그런 때가 있어요?”
“그럼. 쌤도 사람인데….”
“전 선생님들은 그런 생각 안 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다 실행에 옮겨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니? 인간세상이 아니라 짐승천하가 되는 거지. 신우야, 우리는 인간이기를 절대 포기하면 안 돼. 마지막까지….”
‘마지막'을 강조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간절해 보였고, 나는 순간 묘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할머님한테 연락이 갈 거야.”
“연락, 안 하시면 안 돼요? 제가 말씀 잘 드릴게요.”
“그래, 말씀 잘 드려. 전화드리면 많이 놀라실 것 같은데. 그래도 연락을 안 드릴 수는 없어.”
전화를 받은 후의 할머니 표정이 상상됐다. 누구보다 착한 손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니, 내 마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교무실을 나선 후, 발걸음이 이끌린 듯 개구멍으로 향했다. 더할 나위 없이 푸르른 오후였다. 하늘이 너무 예뻐 욕이 나올 것 같았다.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찾아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살갗이 까이고 피가 흘러내렸다. 초록의 나뭇잎과 선홍색의 피가 대조되어 기이한 어울림을 이루었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