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의아하다.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하면서. 탐조 준비를 하며 눈에 빛을 발하던 송이 앞에서 투둑, 도토리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듯,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갑작스레 나와 버렸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영글어가는 도토리처럼, 내 안에서 어떤 마음이 익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갈까, 장비 무거울 텐데?”
내가 내뱉은 말을 곧바로 다시 주워 담으려다 그냥 거기에서 멈췄다. 송이한테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고, 내심 송이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 그럴래? 사실 혼자 가려니 좀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잠시 멈칫하는가 싶던 송이가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하던 순간, 나는 하마터면 활짝, 미소 지을 뻔했다.
인생은 때로 말 한마디에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날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곳을 송이와 함께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송이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후부터 나는 겨울방학이 기다려졌다.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간은 내게 새로운 일상을 선사했다. 교통편을 알아보고, 목적지인 동경강 근처 맛집을 탐색하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나는 작은 기쁨을 느꼈다. 마치 천천히 달려가는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음미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소소한 즐거움은 자칫 나태해질 수 있는 방학 기간 동안 내게 처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는 송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 좋다. 송이와 대화하다 보면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깨우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대화가 오갈 때.
“탐조 갈 때는 갈색 계통 옷 입고 와야 해.”
송이가 ‘갈색’을 강조하며 말했다.
“내 옷은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색인데….”
“하긴, 그런 것 같긴 하다. 네 옷들 다 칙칙~하지.”
특별히 어두운 색상을 선호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보니 내겐 원색의 옷이 거의 없었다.
“왜 그런 거야?”
“원색 옷은 새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든.”
나는 새들이 사람보다 몇십 배는 더 좋은 시력을 지녔고, 색을 보는 눈이 민감하며, 새끼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일부는 호두의 단단한 껍질을 깨기 위해 도로 위를 달리는 차를 이용할 만큼 똑똑하다는 사실을 송이와 얘기를 나누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내게 우주의 블랙홀만큼이나 미지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넓고도 깊은 세상 하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지난하지만 흥미로운 과정인 것 같다.
송이가 탐조를 준비하는 과정은 순탄하고 즐겁지만은 않아 보였다. 송이는 부모님으로부터 ‘쓸데없는 짓’에 돈 쓴다는 핀잔을 들었고, 때때로 내게 부모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내게 이런 얘길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어김없이 덧붙이며. 그럴 때마다 송이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는데, 나는 그 순간의 송이가 부러우면서도 안쓰럽다가, 이내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빠지곤 했다. 내가 보기에 송이가 새들에 관심을 가지고 열정을 쏟는 건 전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난 그걸 송이가 꼭 알았으면 싶었고, 이런 내 생각을 송이에게 전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눈에는 쓸데 있어 보이는 데, 그것도 아주 많이.”
어느 날, 시무룩해 있던 송이에게 내가 말했다.
“정말?”
송이의 두 눈이 주민등록증 사진 속의 그것만큼이나 커졌다.
“응. 너 탐조 준비하면서 즐겁잖아…?”
송이가 고개를 여러 번 크게 끄덕여 보였다.
“이거 못하면 너 또 우울해질 거고, 우울해지면 너 또 팔에 장난치고 싶어질 거고… 그러다 재수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건데….”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 없던 송이가 이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넌 지금, 네 목숨 구할 수도 있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오~~ 정말 그러네. 이신우, 제법이다?! 너,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말 잘하는 인간 유형이었구나?”
어른들이 말하는 ‘쓸데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얼 가리키는 건지 모르겠다. 송이는 일 년 동안 아껴 모은 용돈을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기꺼이 바쳤고, 그렇게 바친 돈이라고 해봤자 어떤 아이들의 한 달 학원비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는 학원. 그래서 한 달에도 몇 번씩 도망치고 싶어지는 학원 수업에 돈을 쏟아붓는 것이 내게는 정말 쓸데없는 일처럼 보인다.
추위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일월이었다. 방학을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난 시점, 나는 송이와 겨울철새를 보기 위해 동경강으로 향했다.
탐조를 떠나던 그날, 다행히 바람이 잔잔해 체감 온도는 그리 낮지 않았다. 송이 말로는 바람이 거센 날에는 새를 보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아침 일찍 탐조를 떠날 준비를 마치고 송이 집 앞으로 향했다. 고모에게는 아파서 편의점에 나오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 대타를 나간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몹시 상기된 모습으로 나타난 송이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탐조 장비들을 넘겼다. 쌍안경, 필드스코프 그리고 삼각대.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새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마음에 고이 담고 싶다던 송이의 말이 생각났다. 탐조장비들을 내 배낭 안에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장비들을 비워낸 송이의 가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간식거리들일 테다.
동경강까지는 버스로 세 시간가량 걸렸다. 출발할 때 화창했던 날씨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살짝 흐려져 있었다. 우리는 미리 찾아본, 동경강 부근 시내의 맛집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마을버스를 타고 동경강으로 이동했다.
버스를 내린 후 조금 걷자 강 옆으로 펼쳐진 장대한 갈대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옅게 부는 바람에 갈대들이 같은 방향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볼을 아리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윤슬로 반짝이는 강은 따스해 보였다. 한낮의 구름 뒤에 숨은 해가 아스라이 강을 비추고 있었다. 저 멀리 강 맞은편 건물들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주인인 도시를 벗어나자, 반짝이는 강과 그 강을 터전 삼아 살고 있는 갈대와 새들이 주인공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갈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말고는 거짓말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갈대밭 사이로 드문드문 몸을 낮춘 채 쌍안경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최대한 새들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자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 예전에 송이가 얘기했던, 새 사진을 찍기 위해 새들의 둥지를 망가뜨리거나 돌을 던질 것 같은 이들은 이곳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눈에 담으며 서 있었다. 강 위를 날던 이름 모를 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강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호사비오리를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한대도 괜찮아. 지금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
송이가 새들의 움직임을 좇으며 불쑥 말했다.
“호…무슨 오리?”
“호. 사. 비. 오리. 이렇게 생긴 애들이야.”
송이는 가지고 있던 새도감을 잽싸게 펼쳐 내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길게 뻗은 머리깃과 빨간 부리가 돋보이는 오리 두 마리가 물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암수 한 쌍인 것 같았다.
“멸종 위기종이라 보호받는 애들이야. 천연기념물이기도 하고. 짝꿍에 대한 의리가 대단해서 암수가 이렇게 같이 붙어 다니는 경우가 많대.”
송이가 새도감을 이리저리 뒤적이자, 헐거워져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 송이가 얼마나 열심히 새도감을 살펴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계절 탓인지 평소 하지 않던 공부를 열심히 해서인지, 송이의 입술이 트고 갈라져 있었다.
“그렇구나… 그럼, 호사비오리 찾으러 우리도 내려가볼까?”
내가 말하자,
“그래. 이제 가보자!”
송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비를 짊어진 채 내 키 높이만큼 올라오는 갈대숲 사이를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출발할 때 가볍게 느껴졌던 장비들이 시간에 비례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그려본 것 같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여기 오니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분이야.”
송이가 말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그런 기분은 평생 몇 번쯤 느낄 수 있는 건지도. 나와는 다르게 송이는 발걸음도 목소리도 날개를 단 듯 가벼워 보였다. 새들을 지켜보는 동안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우리가 일종의 주거침입을 한 셈이었으니까. 그곳은 새들의 집이고 영역이었다. 우리는 갈대숲 사이에 삼각대를 얌전히 설치하고 그 위에 필드스코프를 올렸다. 송이는 연신 쌍안경으로 강 주변을 관찰했다. 차가운 바람이 때때로 뺨을 스쳤고, 볼에서 감각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자세를 낮춘 채 움직임도 거의 없이 몇 시간이고 새들을 지켜보는 일은 극한의 훈련과도 같았다. 순간순간 ‘내가 왜 여기 온다고 했을까?’ 후회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송이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빨갛게 얼어붙어있는 송이의 코끝에 왠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러면 조금 전의 후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그날, 여러 종류의 새들을 보았다. 호사비오리는 끝내 보지 못했지만, 송이는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새들이 보일 때마다 송이는 새도감을 빠르게 펼쳐 보이며 기쁜 표정으로 내 귀에 새 이름을 속삭여주었다. 내게 속삭일 때마다 송이의 입에서 뭉게뭉게 솟아오르던 하얀 입김이 내 귓불을 간지럽혔다. 사실 나는 호사비오리를 제외하고는 송이가 알려준 새 이름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건 그날의 풍경과 바람과 냄새다. 새들이 하나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던 모습, 노을을 이고 아련한 빛을 발하던 갈대숲과 태어나 처음으로 본 것 같던, 처연하면서도 포근해 더 아름다웠던 눈. 그리고… 차가운 겨울바람 끝에 묻어나던 따스한 송이의 향기.
노을이 질 무렵 우리는 갈대숲을 되돌아 나왔다. 갈대숲을 거의 빠져나올 때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강 너머 희미하게 서 있던 건물들이 내리는 눈에 가리어져 더 이상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자그맣게 날리던 눈발이 금세 굵어지더니 이내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되었다. 눈은 사선을 그리며 부드러우면서도 세차게 내렸다. 새하얀 눈이 강 위, 갈대숲 위, 새들의 머리 위, 그리고 송이와 내 머리 위로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눈을 맞은 우리의 모습이 점점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새들이 ‘끼루룩 끼루룩’ 내지르는 소리가 눈으로 가득한 공기 속으로, 인적 드문 시골 마을의 크리스마스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를 앞질러 가던 송이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이신우! 너 이어폰 가지고 왔지?”
“응. 왜…?”
“나, 음악 듣고 싶으니까 아무 거나 틀어줘. 지금 여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면 더 좋고.”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주머니 속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 송이의 귀에 조심스럽게 꽂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을 재생시켰다.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던 송이가, 멈춰 선 그 자리에서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송이의 몸짓에 점점 리듬이 실려 갔다.
“이거 무슨 악기야?”
송이가 물었다.
“색소폰.”
“섹스, 폰?”
송이가 소리를 낮춘 채로 개구쟁이같이 웃어댔다. 그러자 하얀 눈송이들이 송이의 입안으로 나풀나풀 내려앉았고, 송이는 마치 맛난 간식이라도 먹은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온몸에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물결을 탄 듯 하늘거리다가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부드러운 날갯짓을 하며.
“연주하는 사람 이름이 뭐야?”
송이가 한쪽 이어폰을 빼내며 물었다.
“버드(Bird), ‘새’라는 별명을 가진 재즈 연주가. 본명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그래서구나. 연주가 마치… 새가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제 보니 재즈는 새의 날갯짓이랑 어울리는 음악인 것 같다. 자유로워. 좋다!”
“그래서 나도 재즈가 좋아. 아무것에도 얽매여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내 말에 송이가 싱긋 웃어 보이며 이번에는 음악에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렸다.
웬일인지 송이는 끝내 내게 곡명은 묻지 않았다. 왜 난 그때 그 순간 찰리 파커의 '사랑하고 싶은 기분이야(I'm in the Mood for Love)'가 생각났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 같은 그 무엇인가가 그때의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정말 운명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신우 너, 그거 알아? 호사비오리 수컷은 암컷한테 구애할 때 멋지게 춤을 춰. 이렇게!”
호사비오리의 날갯짓을 닮은 송이의 몸짓이 점점 반경을 넓혀나갔다. 갈대숲 사이를 새하얗게 채우며 눈이 내리고 새들의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아련하게 흘렀다. 눈 내리는 노을을 배경 삼아 춤을 추는 송이의 모습이 꿈결인 듯 느껴졌다.
“신우야!”
송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내 이름을 불렀다.
“응?”
“우리, 연애할까, 찐~하게?”
“뭐…?”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나는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나 지금, 너한테 고백하는 거다. 호사비오리 수컷처럼!”
그 순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믿지 않았던, 하지만 이제는 믿고 싶은 그 말, 사랑이 내 가슴속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자 마음 한편에서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어떤 것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
내 물음에 송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마도.”
“아마도, 는 뭐야?”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 보면 가슴이 한 번씩 막 울렁울렁 해. 울 것처럼.”
“뭐야, 내가 불쌍해서 사겨준다는 말이야?”
“음… 측은지심 같은 거랄까? 그런데 말이야, 난 아무한테도 그런 감정 느껴본 적 없어. 새들 말고는. 그리고 너 좀, 잘생겼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네가 좋은 거다. 새들만큼!”
송이가 내리는 눈을 헤치며 높이 날아오르고 있는 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송이의 머리 위에 걸린 노을이 후광처럼 비쳤다. 금빛의 노을과 새하얀 눈과 춤을 추는 송이의 모습이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하나로 어우러져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박혔다.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위 때문인지 어쩐지 가슴이 시려왔다.
“그래,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송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송이의 입술이 튼 자리에 선홍빛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송이는 잠시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가슴이 더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이라고 미뤄뒀던 그것….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송이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설수록 나를 바라보는 송이의 고개가 조금씩 뒤로 기울어졌다. 우리의 발끝이 서로 닿았을 때, 나는 송이를 내 품 안으로 살포시 끌어안았다. 이윽고 송이의 얼굴 위로 겹쳐질 듯 내 머리가 점점 아래로 향했고, 마침내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송이의 입술과 맞닿은 내 입술이 촉촉하고 따스해졌다. 이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체온만큼 따뜻한 액체가 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그것을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내 안으로 삼켰다. 처음에 비릿했던 맛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묘하게 달콤한 여운을 남겼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전율이 한차례 온몸을 훑고 지나간 후, 한동안 송이의 차가운 볼과 따뜻한 입술을 느끼며 그 모습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송이와 내 볼 사이를 비집고 눈송이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울 것 같았던 내 마음을, 볼을 덥히고 있던 내 뜨거운 눈물 한 줄기를.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치 고요하고 깊은 물속에 송이와 나 둘이서만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숨소리에만 귀를 열어둔 채로.
송이와 내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송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여 송이가 젖은 내 볼을 알아차릴까 황급히 손으로 물기를 훔쳐내며.
“송이 넌 평범하지 않아. 특별한 사람이야. 수많은 별들 중 가장 빛나는 별같이….”
송이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나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신우 너, 좀 많이 느끼한 녀석이었구나? 어떻게 감추고 살았을까, 그 속에 늑대 한 마리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글쎄….”
내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너, 진짜 좀 수상하다?”
송이가 나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등 뒤에 간신히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해졌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 나랑 사귀려면 두 가지 약속해줘야 할 게 있어.”
송이가 이번엔 또 어떤 조건을 내걸려고 하는 걸까, 내심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송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도 사랑이 허락된다면, 내게 주어지는 것이 그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뭔데?”
“약속한다고 약속해!”
“뭔 말이 그러냐?”
“싫다는 거야?”
“아니, 약속해. 약속할게!”
“담배 끊어.”
“너, 알고 있었어?”
“내 코가 개코거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암튼, 난 내가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할 거니까 담배는 좀 끊어주면 좋겠어. 만약 못하겠다고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이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송이와 내가 얼마나 많은 입맞춤을 나누게 될까를.
“아니, 끊을게. 끊을 수 있어. 다른 하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내 앞에서는 절대 주먹 쥐지 마.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거든.”
여름날의 골목길에서 피범벅이 된 주먹을 쥔 채 서 있던 나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던 송이가 생각났다. 그때 송이는 나를 버려둔 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고 있었던 것인가 보다. 아마도, 나를 위해.
“그래, 그것도 오케이.”
“역시! 마음에 들어, 너.”
송이의 눈이 예쁜 초승달 모양을 그렸고, 가늘어진 눈들이 사뿐히 내려와 송이의 눈썹 끝에 송이송이 매달렸다. 송이를 꼭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나는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