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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Aug 30. 2024

야생닭과 새 그리고 노숙인의 섬

하와이에서 제일 처음 사춘기 딸의 관심을 끈 건 열대의 야자수도 와이키키 해변의 풍광도 아닌, 하와이 거리에서 만난 작은 생명체들이었다. 길을 가다 야생닭과 새들을 맞닥뜨리면, 그제야 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감탄사를 내뱉거나, 내게 먼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본 하와이는 야생닭의 천국이자, 이제껏 봐온 노숙인들 중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에서 확연히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던 대상은, 양계장 따위는 알지도 못할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야생닭들과, 카트를 끌고 다니며 제법 그럴싸한 비닐 천막에서 기거하고 있는 노숙인들이었다.



처음 야생닭을 만난 건 진주만을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버스 정류장 앞에서였다. 닭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불쑥, 야생닭 한 마리가 등장해 우리 가족의 눈에 포착된 순간, 우리의 시선은 그만 치명적 매력의 그 녀석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혹여 주인이라도 있을까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닭이 기거할 만한 공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거리 곳곳을 자유로이 뛰노는 닭들을 보고 우리는 녀석들이 주인 없는 야생닭임을 확신했다)


"우와! 저거 닭 아니야?!"

"이야~진짜 닭이네!!! 웬 닭이 버스정류장 앞에?!!"

"이게 바로 리얼 하와인가 보다!!ㅋㅋㅋ"


버스 정류장 근처 잔디밭을 제 집처럼 오가던 닭은, 우리의 목소리와 시선을 느꼈는지 어땠는지 그냥 저 하던 일을 묵묵히 계속 이어갔고, 난리법석을 멈추지 못한 쪽은, 닭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우리 가족이었다.


"근데 김치보다 훨씬 날씬하다… 우리 김치 다이어트라도 시켜야 하나?”

그랬다. 하와이의 야생닭들은, 우리 김치양 덩치의 반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와이의 신기한 점은, 사람을 제외한, 우리가 마주친 거의 모든 동물들이 매우 날렵한 몸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야생닭도, 새도, 길고양이들도.



하와이 여행을 하며 가장 즐거웠던 일 중 하나는 바로, 우리 마음을 훔쳐간 야생닭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하와이의 야생닭들은 시민들이 오가는 잔디밭, 도로변, 유명관광지 인근을 가리지 않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지천으로 노닐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하와이에 대한 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준 생명체이자,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지 않도록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생닭 근처에는 늘,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 다채로운 새 친구들이 함께해 아이들의 호기심과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인 하와이에 사는 새들은, 여유로운 성품에다 무서워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틈만 나면 빵떡 같은 모양새를 한채, 사람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길바닥과 한 몸이 되어 미동도 하지 않는 새,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음식점 안까지 쳐들어와 호시탐탐 사람들이 흘리는 음식을 노리는 참새(?)도 모자라, 아직 비우지도 못한 밥그릇을 넘보며 턱밑까지, 그야말로, 돌진해 오는 비둘기까지. 처음에는 그저 놀랍기만 했던 녀석들의 행동은, 하와이에서의 체류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우리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따스한 하와이의 대기에 조금씩, 기분 좋게 스며들어갔다.



하와이에는 노숙인들이 야생닭만큼이나 많이 보였다. 그런데 한국에서처럼 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도나 도심 뒷골목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햇빛 짱짱한 대낮에 자신의 짐을 실은 카트를 부지런히 끌고 다니고, 엉덩이 아래로 삼분의 일쯤 내려간 하의와 웃통을 벗어젖힌 상체에(여성이었다) 깃발을 아슬아슬하게 휘감고 버스에 승차하기도 했으며, 비닐 천막을 단정하게 세워 제법 큰 집단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도 후미진 곳이 아닌, 수많은 버스들이 오가는 대로변에. 그리하여 버스를 타고 진주만으로 향하던 나는, 노숙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로변의 파란 비닐 천막들에 그만 시선이 붙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노숙인들이 보여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해가 저물고 난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나간 밤산책길에서, 짝꿍과 나는 한낮의 모습과는 또 다른 노숙인들을 목격하고서는 웃다가, 감탄하다가, 때론 어둠 뒤에서 별안간 정체를 드러내는 그들에게 살짝 졸기를 반복했다. 운하변의 제방을 베개 삼아 자는 노숙인, 관광객들이 숙박하는 호텔 입구 바로 앞에서 대자로 뻗어 자는 노숙인. (그러고 보니,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도로변의 표지판 아래에 운동화를 곱게 벗어놓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 노숙인도 있었다)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단잠을 청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가난에 찌든 자의 고통보다는, 두려움도 수치스러움도 저 멀리 떠나보내버리고 득도의 경지에 이른 도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들이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져, 나도 한 달쯤 하와이안 노숙인으로 지내면 삶을 해탈한 것 같은 오라를 지닐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문득 오래전, 밴쿠버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온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캐나다에서 노숙인이라도 되고 싶더라. 귀국하기가 싫었어…."

휴가를 떠난 여행지에서, 연수를 간 이국에서 노숙인의 삶을 탐하는 생이라니!
자유를 향한 우리의 갈망이, 이해하기 힘든 이 어리둥절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표지판 아래 가지런히 놓인, 낮잠을 즐기고 있는 노숙인의 신발
(좌)저리도 날렵할 수가! (우) 길바닥에 늘어져 일광욕중인 비둘기
우리의 턱밑에서 아침 식사를 호시탐탐 노리던 비둘기. 같은 녀석이 같은 시간 대에 반복적으로 오는 것 같았다.

그날의 에필로그>>

야생닭과 진주만의 하늘을 만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했다. 하얏트리젠시 호텔 근처 반얀트리 앞에서 펼쳐질 무료 훌라공연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매주 화, 목요일 6시 반에 반얀트리 앞에서 공연이 펼쳐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장소 그 시간에 공연은 없었다. 아마도 목요일 대신, 누군가의 말처럼, 토요일에 한 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맞은 와이키키 해변의 노을이, 우리가 손꼽아 기다렸던 공연보다 더 멋진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노을에 시선이 젖어가던 어느 시점부터, 아쉬움은 자취를 감추었고, 행복의 기운이 우리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아… 하와이 오길 정말 잘했다!”

몇 달에 걸쳐 메워 나가야 할 통장 잔고를 순간 말끔히 잊어버릴 만큼, 와이키키의 노을은 아름다운 마술을 부렸다.

눈부신 햇살 아래의 하와이 거리. 선글라스는 선택이 아닌 필수!
노을에 물든 와이키키 해변

태평양이 싣고 온 파도는 가만가만 해변을 쓰다듬었고, 파도를 마주하고 춤추는 여인의 새하얀 치맛자락은 호수의 물결처럼 부드러이 밤바람에 나부꼈다. 노을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다정하게 기대어 있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그림처럼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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