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에 대해 알게 된 건 우연히 본 독일 관련 영상물을 통해서였다. 그즈음 나는 바이에른으로의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내 취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알고리즘- 알고리즘은 때때로 나를 소름 돋게 만든다- 이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하는 내용이 담긴 영상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이제껏 접해본 적이 없었다. 수용소의 규모나 잔혹성 면에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대표적인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하우는 인구 4만여 명의 뮌헨 북서쪽의 소도시로, 뮌헨에서 S-Bahn(전철)을 타면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저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다하우 수용소 소속의 *부속수용소인 '튀르크하임' 수용소에 마지막으로 수용되어 있다가,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직전에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고 한다.
다하우를 이번 여행 일정에 필히 포함시키고자 싶어 했던 건 나였다. 아름답고 좋은 것만을 보고 듣는 여행이 아닌, 어두운 역사가 서려있는 곳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이들에게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꼭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히틀러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던 바이에른 지역을 방문하면서 다하우를 방문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오늘은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여행하는 기간 동안 아침이면 아이들은 늘 같은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갈 거야."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던 그다음 날인, 여행 삼일 차 아침이었다. 나의 대답에 아이들이 차례로 해괴한 탄성을 내뱉었다. 가기 싫어하는 마음이 절로 튀어나온 것이었으리라.
"거기, 굳이, 꼭 가야 해?!"
"응, 뮌헨이랑 가깝잖아. 가 봐야지.”
나는 '판트를 꼭 직접 환급받고야 말겠다던' 짝꿍의 다짐만큼이나 단호하게 말했고, 불평을 늘어놓아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겠다고 생각한 듯 아이들은 이내, 소극적이지만,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S-Bahn을 타고 다하우역에 도착,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십여 분을 더 가 다하우강제수용소 인근에서 내리자,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신기했던 건, 내리던 눈이 도로를 건너자 마치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듯 흔적을 감췄다는 사실이었다. 묘한 기분에 한동안 도로 건너편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조금 전 지나온 땅 위로는 옅은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눈구름이 보여준 경계였을 테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이 다하우에 서린 영혼이 보여주는 표식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하우강제수용소는 독일 내에 설치된 수용소로,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직후에 지어진, 나치 독일이 만든 최초의 강제수용소이자, 이후 만들어진 나치 강제수용소의 모델이 된 곳이다. 처음에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초창기에는 정치범이나 지식인, 언론인 등이 수용되었으나, 점차 더 많은 유대인들이 끌려와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도 아우슈비츠처럼 가스실은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제 대규모 학살용으로 운영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일제강점기의 '731부대'처럼 가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생체실험이 자행된 곳인데, 현존하는 수용소 건물은 방문객들을 위한 전시관이나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에도 2차 대전 당시에 실제로 이곳에서 사용된 물건들, 나치와 수용자들의 사진 및 생체실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흑백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참상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다시는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자 하는 독일인의 굳건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자들이 느꼈을 절망감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려 잠시 멈춰 선 채, 수용소 창 너머의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신분으로 살고 있는 현실의 나로서는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년 전 이곳에 수용되었던 이들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웠고, 현실에 대한 안도감부터 스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나는 몹시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흡사 메타세쿼이아 길을 떠올리게 하는, 수용소 내에 쭉 뻗은 가로수들 때문이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에는 족히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가로수들이 질서도 정연하게 서 있다. 봄, 여름이면 나무들은 필시 푸르른 잎사귀들이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낼 것이다. 지구상 그 어느 곳보다 참혹했을 이곳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들이 연출해 내는 기괴한 풍경이란.. 악은 선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고 했던가. 인간의 잔혹성과 아름다운 생명이 보여주는 극명한 대비 앞에서 느낀 나의 감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귀한 생명을 심으며 나치가 생각하고 계획했을 잔혹하고 추잡한 것들에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는 것 말고는. 저 나무들은 보았을 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시달리고 병들고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같은 인간에게서 생체 실험을 당하며 생명을 잃어가던 순간들을.. 그 생각에 이르자 어쩐지 죄 없는 나무들마저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 섬뜩함에 불현듯 아득해진 나는, 다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수용소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성실한 학습자의 태도로 전시물들을 살펴보는 짝꿍과,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의 아이들이 동시에 내 시야에 들어왔다. 딸램은 수용소 한편 의자에 앉아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고, 짝꿍은 전시물에 적혀있는 독일어 설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며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역사가 주는 의미를 아이들과 함께 배워보겠다던 부푼 다짐은 나만의 욕심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2024년 12월의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이들은 과연 이 전시물들을 보며 딴 세상의 동떨어진 이야기로만 여겼을까. 어쩌면, 이곳까지 가족 여행을 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수용소를 빠져나와 인근에 위치한 방문객 센터에서 파스타에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덥히자,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깃드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경계를 짓는 것 같던 눈은 그쳐 있었고, 기대하지 않은 파스타는 입맛을 제법 돋웠다.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내가 본 독일은 분명 과거가 주는 교훈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잊히지 않아야 할 과거가 지치지 않고 기억될 때에야, 현재와 미래가 올곧이 존재할 수 있음을, 다하우에 서린 상흔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바이에른 지역에 이러한 부속 소용소들이 촘촘히 퍼져 있었고, 2차 대전 막바지로 갈수록 그러한 상황이 더욱 참혹해졌다고 한다.
** 현재는 가로수 주변으로 공터가 펼쳐져 있으나, 2차 대전 당시에는 가로수들을 따라 수용소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아래 마지막 사진 속 오른편을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