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을 공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열려 있는, 호텔 레스토랑 한 편의 커피 머신처럼 생긴 작은 기계에서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었고, 비용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약간 주저되고 뻘쭘한 상황에 처하긴 했지만.
지난 하와이 여행 중 물 한 잔에도 돈을 요구받던 상황들이 떠올라 내심 우려스러웠는데, 같은 자본주의 사회지만 미국과 유럽 문화 간에도 확실히 차이가 있는 듯 헸다. 사람들의 표정과 거리의 분위기는 하와이가 더 자유로워 보였으나, 인심은 독일이 훨씬 후했다. (필요하면 레스토랑 한편에 비치된 컵을 자유로이 이용해도 좋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용기 안의 라면을 끄집어내 숙소방에 남겨두고, 컵라면의 '컵'만 든 채 쭈뼛거리며 뜨거운 물을 갈구하던 우리에게 베풀던 호텔 직원의 친절함은 은혜로움 그 자체였다.
엄마와 아빠가 위풍도 당당하게 구해 온 뜨끈뜨끈한 물 덕분에 라면으로 배를 두둑이 채운 아이들은,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잘 먹었으니까 이제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 서둘러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까."
컵라면 덕택에, 평소보다 일찍 시작해야 하는 하루를 예고하면서도 짝꿍과 나는 아이들 앞에서 좀 더 의연할 수 있었다. 자고로 잘 자야 여행도 잘할 수 있는 법. 추운 날씨에도 환기를 할 각오로 컵라면을 먹은 데에는 더 잘 걷고, 더 잘 보고 경험하는 가족 여행을 바라는 마음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걷기에 인색한 아이들도 이번 여행 기간 동안 매일 만보도 훌쩍 넘게 걸어 다녔다. 그러니까, 뜨거운 물은 아이들이 다리가 아프다며 불평할 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우리 부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온라인 게임의 필수 아이템과도 같은 것이었다.
뮌헨에 도착하고 첫 아침이 밝아온 날, 우리가 향한 곳은 '노이슈반슈타인'으로 잘 알려진 퓌센(Füssen)이었다. 퓌센은 기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뮌헨 근교의 소도시다. '바이에른 티켓'을 이용하면 뮌헨 및 뮌헨 근교 도시를 오가는 대중교통을 하루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하는 총인원수가 많을수록 가성비가 더욱 좋아지는 장점이 있다. 올 겨울 독일도 평년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겪고 있었고,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 짝꿍과 나는 눈 덮인 겨울 들판을 마음껏 감상하는 호화를 누렸다. 비록 아이들은 잠을 자느라 바빴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하는데, 이용 가능한 시간이 2시 무렵 한 차례로 정해져 있다. 해당 시간에 혹여 지각할까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둘러 이동했고, 성 입구에 도착했을 땐 입장을 무려 두 시간 가까이 남겨 둔 상황이었다. 퓌센 역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성 근처에 내려, 겨울 산 위에 처연히 서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발견한 순간,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은 사람처럼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성이, “헨젤과 그레텔”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침엽수림 위로 그 자태를 드러냈다. 오랜 꿈을 이루게 되면 이러한 감흥에 빠져들게 되는 걸까. 퇴색된 줄 알았던 동심이 우르르, 마음 한편에서 뛰쳐나오는 듯했다. 머릿속을 스치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겨울왕국의 온갖 캐릭터들이 노이슈반슈타인 성 깊숙한 어느 공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꼬꼬마 소녀가 맘 속에 품어온 동화 속 성이, 중년의 여인이 된 소녀를 마침내 맞아준 것이었다.
성에 입장하기 전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왕국이 실사화되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탁 트인 들판 너머로 눈 덮인 호수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실제 '디즈니성',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이 된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바이에른 왕국의 가장 낭만적 군주로 알려진 루드비히 2세가 남긴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그는 중세적 화려함이 깃든, 독일 신화 속 이상적 왕국을 구현해 내기 위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들어간 천문학적 비용으로 막대한 국가 부채가 발생했고, 이 때문에 그는 정부와 귀족들에 의해 베르크 성에 연금되는 몸이 되어버렸다.
마흔의 짧은 생을 살고 간 그가, 정작 그의 꿈이었던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살았던 건 채 6개월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훤칠한 외모에 편집증적인 정신세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는, 어느 저녁 산책 후 슈타인베르크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죽음에까지 이른 정확한 과정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그가 비참한 생의 끝을 맞게 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지금은 독일에서 가장 핫한 관광지로 엄청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이 역사적 아이러니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스며 나왔다.
판타지 속 한 장면을 선사하는 것 같은 환상적인 성의 자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즐거움을 준 건 성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맞은 여러 순간들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듣기 좋아."라던 아들의 말, 오르막길이 힘들다며 내게 바싹 붙어 팔짱을 끼던 딸에게서 전해져 오던 온기, 미소 띤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오가던 관광객들의 여유와 너그러움, 이 길 끝에서 아름다운 성과 만나게 되리라는 부푼 기대가 솟아나던 찰나, 말똥 냄새가 지독하다며 괴성을 질러대던 끝에 웃음이 터져 나오던 때와 같은.. 심지어, 성을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볼 수 있다는 *'마리엔 다리'에서 심각한 고소공포증을 호소하던, 긴장이 바싹 오른 아들의 표정과 말까지도 머릿속에 가슴 몽글한 감각으로 각인되었다. 성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새하얀 길을 내던 비행운은 성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였고, 성 앞마당에 홀로 묵묵히 서 있던 크리스마스트리는 루드비히 2세의 죽음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오디오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화려함 그 이상을 보여 주던 성의 내부를 따라가 보며, 19세기 루드비히 2세가 성에 머무른 날들을 상상해 보았다. 외딴섬과 같은 이곳에서 그는 진정 행복했을까. 행복을 제대로 누려보기도 전에 불안감에 휩싸인 날들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성이 완공되는 것을 미처 다 보지도 못하고 생을 다한 그를 생각하며, 성밖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겨울 호수를 마주한 내 마음이 괜스레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스러움은 성을 내려온 후,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던 케데헌의 '골든'을 들으며, 한 시간 넘게 연착되던 퓌센역까지의 버스를 기다리며 조금씩 희석되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우리의 가슴을 졸이게 하던 버스는, 밤의 조명을 받으며 은은하게 빛나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올려다볼 기회를 선사했고, 우리는 성 너머로 천천히 저물어가는 퓌센의 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느린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별 계획 없이 떠난 여행 덕분에 그날 우리에게 특별히 정해진 다음 일정은 없었고,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자, 조바심 대신 기분 좋은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대표적 사진은 주로 마리엔 다리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