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도 ‘한자’가 있다

by 지뉴

학창 시절 세계사 수업을 들으며 '한자동맹'을 접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 그 단어를 접했을 때 어리둥절해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중세독일의 상업적 동맹을 일컫던 한자(Die Hanse)를 한자(漢字)로 오인하면서 나타난 반응이었다. 생애 처음 독일의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을 타며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탁 트인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루프트한자의 매끈한 동체를 마주하고선,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상업적 연맹을 맺었던 중세 독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뮌헨 공항까지는 무려 13시간이라는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지만, 비행시간에 대한 부담보다는 그 후에 펼쳐질 독일의 풍경들에 가슴이 부푼 풍선 하나를 품은 듯 들떴다.


독일어로 'Luft'는 공기를 일컫고, ‘Hansa'는 위의 한자동맹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루프트한자를 직역하면 '항공연맹'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외국 항공사(특히 유럽행)를 탈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해당 지역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스튜어디스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와 사뭇 다르리라는 것이다. 루프트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 승무원과 한국인 승무원이 거의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한국인 승무원이 젊고 단아한, 몹시 정제되고 상냥한 느낌이었다면, 독일 승무원은 중년에 접어든 지 제법 된 듯한, 한국 승무원에 비해 다소 거칠어 보이는 외양이지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친절하고, 건강하며 씩씩해 보이는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서비스는 시선보다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었고, 어쩌면 나도 저 자리에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의지까지 북돋워주는 힘이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현실에서 실천해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기도, 몹시 부럽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은 독일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이어졌는데, 실제 레스토랑이나 빵집, 기념품 가게 그 어느 곳을 가도,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중년(혹은 그 이상)의 여성이나 남성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했던 건, 기내에 한국어가 지원되는 영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루프트한자만의 단점인지도 모르겠으나) 혹 독일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영상 시청이 어려우므로 책을 꼭 준비해 가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겨울 대지를 따스하게 덥히는 불빛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그중에는 우리나라의 김민재 선수가 뛰고 있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도 있었다. 나는 다른 곳에 시선을 주느라 미처 보지 못했으나, 붉은 존재감으로 빛나는 경기장을 발견한 짝꿍은 그 광경이 몹시 반갑고 신기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뮌헨에 오면 누구나 축구팬의 마음가짐이 되지 않을까. 평소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짝꿍도 뮌헨에 머무르는 동안은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을 입고 지나는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가 있던 날에는, 바쁜 스케줄 가운데서도 아레나 앞에 한번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제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것과 흡사하다는 이미지. 실제로는 더 작게 보인다고..

뮌헨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여섯 시 반 무렵이었다. 겨울의 독일도 일찍 해가 지기 때문에 이미 사위는 한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추위 또한 생각 이상으로 기세등등했다.


내게는 독일인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있다. 각진 얼굴에 무뚝뚝한 표정.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고, 합리성을 최고로 추구한다는 그런.. 외모적으로 말하자면 '게슈타포' 같은 이미지랄까. 그건 아마도 2차 세계대전 관련 콘텐츠들을 많이 본 나의 개인적 취향 때문이기도 할 테다. 실제 뮌헨 공항에서 마주한 출입국심사관의 첫 이미지는 내가 예전부터 그리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최근 국제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미국의 ICE(이민세관집행국) 요원을 닮은 듯한 얼굴에 순간 마음이 주춤거렸다. 최근 까다로워진 입국심사 때문에 이미 공항에서 지문과 사진까지 등록한 상태였던지라, 그가 까다로운 질문으로 입국을 더 지연시키며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짝꿍이 심사관의 질문에 독일어로 답하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기대감 같은 것이 어리는 것이 아닌가.

"독일어를 할 줄 알아요?"(물론 그는 독일어로 물어왔다)

"아주 조금이요."


짝꿍의 대답에 직원은 뜻밖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알아듣기 힘든 속도의 독일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짝꿍은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간 공부한 독일어를 써먹어보겠다는 의지로 독일어를 말하기 시작하면,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독일인에게 독일어 공세를 받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을.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적용될, 단 한 줄의 완벽한 독일어 문장을 줄곧 머리에 새기고 있었거늘.

'Ich spreche kein Deutsch.(이히 슈프레헤 카인 도이취 : 나는 독일어를 할 줄 모릅니다)'


마침내 우리는, 외모는 ICE 요원 같지만, 언행은 다소 귀엽기까지 했던 출입국심사관과 짧은 독일어대화를 나누고 무탈하게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왔다. 숙소는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는 흡사 전쟁 중의 지하 벙커 느낌을 주는 독일 지하철*을 타고 호텔에 도착했고, 온라인으로 미리 체크인을 해 둔 덕에 신속하게 우리의 룸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뜨거운 물을 공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숙소 방에 **커피포트가 없었다는 것. 경제적 여행을 지향하며 구한,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를 연상시키는 숙소에는 최소한의 것들만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은 금세 적응이 되었고,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오밀조밀 밤을 함께 보내는 기분이란, 좋아하는 사람들과 MT를 온 듯 퍽 즐거운 것이었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컵라면 타령을 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짝꿍과 나는 모이를 구하러 나가는 어미새의 비장한 심정으로 숙소 방을 나섰다.

뮌헨공항역 광장 너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 숍’이 우리를 맞이한다.
2층 침대에서 내려다본, 화장하는 딸의 진지한 뒷모습

*독일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는 '독일의 대중교통'편에서 다뤄 볼 예정이에요.

**. 유럽여행 시 여행용 커피포트를 휴대하는 이들이 꽤 된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