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와이를 다녀온 지 일년 반 만에 온 가족이 독일로 향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대 이상으로 좋은 기억들이 많이 남아,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짝꿍과 함께 '여행 적금통장'을 만들어 다달이 살집을 불리긴 했으나, 적어도 다음 해외여행까지는 이 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시 타국을 방문하고 싶은 바람을 내비치자, 우리 부부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소망이 더불어 꿈틀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법 격한 움직임으로 말이다.
짝꿍은 자칭타칭 독일빠(마니아)고, 나 또한 독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하며 독일 문화를 접할 기회를 가졌고, 그 과정에서 거친 듯 절제된 독일어 발음만큼이나 독일인들의 절제되고 검소한 일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어 공부는 나의 대학 시절까지도 쭉 이어졌다. 짝꿍은 한때 영사직을 꿈 꾸며 독일어를 제법 깊이 있게 파고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독일어 문화권에 속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우리가 반드시 방문해야 할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이들 겨울 방학을 맞아 우리가 크게 망설이지 않고 독일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게 된 데에는 저렴한 독일 물가가 한몫했다. 유럽에서도 부유한 국가로 꼽히지만, 일상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만큼은 꽤 착한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독일이기에. 불평불만 많은 사춘기 아이들을 동반하고 가는 여행이라 가급적 동선을 복잡하지 않게 만들려 했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바이에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뮌헨(München)을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삼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낭만적 감성'과 '전쟁광' -짝꿍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적 관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바이에른주는 '로맨틱 가도(Romantische Straße)'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디즈니성의 모델이 된, 그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Neuswanstein) 성이 있는 퓌센(Füssen)이 로맨틱 가도의 종착지라고 보면 된다. 수려한 경관과 낭만적 감성을 품고 있는 바이에른 지역은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의 별장이 있었던 베르크호프(Berghof)는 그가 에바 브라운과 비밀스럽게 사랑의 감정을 키운 곳으로, 바이에른의 산 중턱에 여전히 남아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신과 함께 한 마지막 비서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를, 그녀가 단지 뮌헨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지원자들 중 선택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이에른 주를 편애했는지 알 법하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심신을 뉘이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감정인 사랑에 빠졌던 그가 세상에 보여준 잔혹성을 생각하면,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믿기 힘든 이러한 모순성에 대한 호기심 또한 이번 여행지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뮌헨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가깝다는 점 또한 베이스캠프로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본 나로서는, '도레미송'의 마지막 장면들을 촬영한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정원'과 그 일대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일인으로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 또한 컸다. 게다가 오랜 세월 '빵순이'로 지내온지라, 종류도 다양한 독일 빵을 마음껏 맛볼 생각을 하니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절로 군침이 돌고, 미소가 더해졌다.
겨울의 독일 여행을 준비하며 내 머릿속에는 이미 '겨울왕국'의 풍경을 닮아 있을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거울 같은 호수,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을, 고소한 내음을 풍기는 노릿노릿 따끈한 빵, 클래식 선율이 부드럽게 흐르는 풍경과 '비포 선 라이즈'의 주인공들이 탔을 법한 트램이 오가는 거리가 꿈결처럼 넘실거렸다. 일상에 부대끼다가 여행 며칠 전쯤에야 찾아온 독일 몽상(트로이메라이)은, 또다시 내 가슴에 힘찬 날개 하나를 달아주는 듯했다. 그 마음에 당장이라도 겨울 호수 위를 훌쩍 건너 노이슈반슈타인 성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