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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an 09. 2023

세단기? No! 새단기

그녀, 살아있는 새단기

우리 집은 문서 '세단기'가 따로 필요 없다. '새단기'가 있기 때문이다.

세단기는 무생물이지만 우리 집에 있는 새단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먹이를 먹어대는 에너지 넘치는 생명체인 앵무새, 그중에서도 암컷 모란앵무이다.

앵무새이지만 인간의 말을 따라 하는 것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는 그녀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가늘고 일정한 굵기로 몹시도 성실하게 종이를 찢어내는 능력이다.

사실 이것은 재능으로 초래된 행동이 아니다. 대다수의 암컷 모란앵무들이 일정한 시기가 되면 보이는 절박한 '구애 행위', 즉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혹의 몸짓'이다.


요즘 그녀는 하루종일 지루할 틈 없이 바빠 보인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녀의 관심은 오롯이 집안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종이들에 있다.

집에는 그녀의 먹잇감이 넘쳐난다. 활자 중독에다 종이책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집주인 덕분에 생산 연도별로 온갖 질감의 종이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흡사 와인 애호가가 '오늘은 1957년 산 OOO'을 한번 마셔볼까?' 하는 눈빛으로 그녀는 오늘의 먹잇감을 골라 집요하게 물고 뜯으며 제각기 다른 감촉과 맛을 음미한다.

이 과정을 거친 종이들은 바닥 곳곳에 흩어지거나, 한 곳에 수북이 탑처럼 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받은 종이는 그녀의 등 뒤에 마치 화려한 공작의 깃처럼 한 올 한 올 고고히 꽂히는 영광을 누린다.


그녀는 종이를 정성스럽게 가르고 자신을 치장하는 것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다. 만약 진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인간 세계에서 그녀를 능가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책을 수집하고 읽고 인테리어 하는 것에 진심인 내 결과물들이, 그녀의 '본능적 진심' 앞에서 한낯 파편 조각들로 변해버린 장면을 접할 때면 화가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짠한 마음이 든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다해 하는 그 일은 결국 그녀가 갈구하는 결과물로써 보답받지 못할 것임을, 그 '허망함'은 나와 같은 이기적 인간의 욕심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책장 전면 너덜너덜 초토화된 잡지들을 바라보며 분노를 삭이고 한숨을 내쉬다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호시탐탐 잡지책을 노리는 그녀를 호통치고 쫓아내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대책을 강구해 보자고. 그녀와의 행복한 동거를 꿈꾸는 인간으로서 필요할 '예의'와 '품격' 이 녹아 있는 대책 말이다.

생각 끝에, 잡지책 전시의 욕망을 접고 좀 더 간소하게 배치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녀가 탐하지 않을 만한 하드커버지의 책들로.


생각보다 집에는 하드커버표지의 책이 많지 않았다. 구석구석 뒤적여 그러모으니 책장 전면을 간신히 채울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세팅을 해 놓고 보니 색감이 너무 좋았다.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단정했다. 거실 전체가 산뜻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뜻밖의 분위기 쇄신에 만족감이 급상승했다.


 하드커버지로 대체된 책장 전면


그녀가 아니었다면 내 소유욕이, 잡다한 잡지들로 책장을 계속 너저분하게 메워갔을지도 모르겠다.

희한하게도, 그날 이후로 잡지책을 위시한 종이책에 대한 내 욕심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도 꿈쩍 않던 내 소유욕이.

오히려 소유하고 싶지 않은 종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난 그녀를 찾는다. 그리고 슬그머니 그녀 앞으로 종이를 들이민다.

소유하고 싶지 않은 내 욕망을 그녀의 본능에 충실히 기대어본다.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녀가 정성스럽게 종이를 '새단' 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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