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가져다준 정반대의 세상

by 지뉴

몇 해 전 일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냉장고 안의 술이 야금야금 없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술 마시는 사람이라고는 짝꿍과 나, 둘.

고단한 일과를 끝낸 후, 좋아하는 프로그램들을 보며 함께 한 잔 기울이는 게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하는 나와 짝꿍의 방식이다.

집에서 우리는 늘 함께 술을 마시고, 또 그날그날 우리가 얼마큼 마셨고 얼마나 남겼는지 확인한다. 냉장고에 맥주, 와인, 전통주 등 종류별로 술병들이 비치되어 있지 않으면 왠지 마음마저 가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꾼이냐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딱 기분 좋을 정도, 와인으로 치자면 한두 잔 정도가 우리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평소 주량이다. 그래서인지 마트에 한 번 다녀오고 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냉장고는 청아한 소리를 내는 술병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술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착각한 걸까?'싶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날이 갈수록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도대체 병 가득 풍요롭게 차올라 있던 그 알코올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아이들이 장난으로 입을 댔다기엔 주기적이고 그 양이 적지 않은 데다가 - 당시 아이들은 유아에 불과했다 - 짝꿍이 나 몰래 혼술을 했다기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봤을 때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엄마였다.



하지만 지극히 술을 좋아한 아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엄마가, 말없이 홀로 술병을 비웠을 리는 만무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묵혀져 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강권으로 저녁상에서 반주를 함께 하던 예전 엄마의 모습이. 엄마가 술 마시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이가 든 이후 아빠는 집에서 반주삼아 술을 들이켜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런 자리에서 엄마는 곧잘 (엄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빠의 술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던 당시 나는 좀 놀랐었다. 엄마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안 마시는' 사람, 아니, 본디 술을 꽤 '잘 마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불콰해진 얼굴의 아빠 옆에 있는 엄마는, 분명 소주 몇 잔을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간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엄마인 걸까?’



내 추측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고, 결국엔 아무렇지 않은 척 스리슬쩍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냉장고에 있는 술이 자꾸 없어지네. 혹시, 엄마가 마신 거야?”

“그래. 그거 내가 마셨다.”


스스럼없는 엄마의 대답에 실소가 나오려 했다. 엄마는 조금도 대답하길 주저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술 먹으니까 힘이 막 나더라. 힘내서 집안일 좀 해보려고 마셨다. 술 마시고 나면 일하는 게 즐겁고 수월해.”


엄마의 말에, 혼자 술을 들이켜며 즐겁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술로 인해 고단한 인생을 지나 온 엄마가 '술을 마시니 힘이 난다'라고 말하는 그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도 짝꿍도 즐기는 술, 엄마라고 못 마실 건 없었다. 마시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힘없이 축 처진 엄마가 아니라, 힘 난다며 '일이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엄마가 훨씬 보기 좋았다. 그래서 결국 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무슨 술 사다 놓을까? 마시고 싶은 술 있으면 언제든 말해!”


아빠는 술을 마시고 '힘을 부렸고', 엄마는 '힘을 내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엄마는 이후로도 몇 년간 때때로 술을 마시며 힘을 내고, 즐겁게 일을 했다. 가끔은 평소 주량을 훌쩍 넘기고는 나에게 귀여운(?) 술주정을 하기도. - 엄마에게는 지나치게 말이 많아지는 술버릇이 있다 -

인생을 깡으로 버텨온 엄마가 가장 즐기는 음주 스타일은 다름 아닌, ‘깡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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