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代)를 잇는 데자뷔(deja vu)
할머니의 집은 우리 집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할머니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도로가 있었고 우리 집은 바로 그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함께 살던 외삼촌 가족마저 떠나고 난 후 줄곧 홀로 살던 할머니는, 가장 지근에 살고 있는 혈육이었던 우리 가족 - 특히 엄마 - 이 잘 지내고 있는지에 유난한 관심을 쏟았고, 우리가 '무탈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하고 싶어 했다.
할머니는 종종 도로변에 서서 건너편 우리 집의 동태를 살피곤 했는데, 이를 통해 가족에 대한 염려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는 듯했다.
이따금 창문을 내다보면 도로 반대편에 곧은 자세로 서서 우리 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철없던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외치곤 했다.
"엄마, 할머니 또 저~기에 서 계셔! 할머니 진짜 무서워!!"
그랬다. 할머니의 자태는 확실히 두려움을 유발하는 면이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한 치의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꼿꼿한 자세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할머니가 어린 내 눈에는 ‘친근한 우리 할머니’이기보다 집요한 ‘스토커’ 내지는 공포영화 속에서 희생자를 찾고 있는 '유령'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그게 다 '관심'과 '걱정'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내게 그건 '감시'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그런데 나보다 엄마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더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도로변에 서 있는 할머니를 발견할 때면 엄마는 평소에 듣기 힘든 날 선 혼잣말을 뱉어내곤 했다.
그런데 요즘 엄마에게서 나는 종종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관심인지 감시인지 애매모호한 그런 상황들 속에서. 그럴 때면 이따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곤 한다. 엄마에게 '그러지 말라'라고 누차 얘기해도 별다른 소용은 없는 듯하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는 엄마는 때때로 집안 구석에 우두커니 서있다.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시간에 출근(등교) 준비는 마치는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양치는 빠뜨리지 않고 하는지, 잠자리는 제대로 준비해 놓은 건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어린 시절 방목된 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인 아이로 성장했던 내가, 40대의 나이에 일상 곳곳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노모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집요하게 지켜보는 시선으로 인해 때때로 옆통수가 서늘해져 오고, 밤늦은 시간 어두운 구석에서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 엄마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네 마트에 나갔다가도 ‘언제 오는 거냐'는 독촉 문자를 받으며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무엇이든 혼자서 해내려고 애썼다. 그건 아마도 부모님이 내 인생에 그리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아서였을 거다. 내게 주어진 '무관심에 가까운 자유'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해 잘 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부모님의 지나친 관심(혹은 간섭)에 대해 투덜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나는 변했다. 지금의 나는, 엄마가 자식보다는 엄마 본인의 시간을 아끼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기를 바란다.
감시 같은 관심을 받는 상황이 싫다가도 때로는 엄마가 안쓰럽기도 하다. 어쩐지 엄마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붙잡으려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의 엄마에게는 - 먹고 자는 1차적인 것을 제외하면 -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따라서, 일상의 어느 것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런 엄마에게 아마도 시간이란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와도 같으리라.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 이후 아무런 준비 없이 들이닥친 무기력한 노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엄마에게 어쩌면 자식을 향한 뒤늦은 관심은, 삶을 지탱하려는 나름의 절박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물끄러미 서 있던 할머니와 겹쳐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다 보면, 그 옛날 날 선 혼잣말을 내뱉던 엄마와 지금의 내 모습이 포개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대를 잇는 데자뷔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종종 생각한다. 미래의 나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아끼고 내 시간에 집중하는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