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임지였던 여자중학교에서의 5년을 끝내고 남자중학교로의 전출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멘붕에 빠졌다.
이제 겨우 여자아이들에게 적응해 가던 내게, 세상을 향한 반항기로 무장한 채 천방지축 날아다닐 것 같은 남자애들만 가득한 '남중'은 마치 야수들이 가득한 미지의 벌판처럼 느껴졌고, 나는 두려웠다.
개학 전 업무분장을 위해 미리 새 학교를 방문한 날 나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내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학년 담임교사로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년 초 학교는 각 학년 아이들과 관련된 소문들이 무성하게 떠돈다. 그 소문이란 대체로 직전 학년 시기 아이들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평균적으로 아이들의 성격이 어떤가, 사고 친 아이들은 많지 않은가, 교사와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는가 등등. 의외로 성적에 관한 얘기는 교사들의 주된 관심 밖이다.
내가 맡게 된 2학년 아이들은 온갖 좋지 못한 소문이란 소문을 다 달고 있는 듯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인근에서 악명 높았고 수업 분위기는 난장판인 데다가, 1학년때 갖가지 학교폭력 사건에 심지어 여교사를 상대로 한 성추행 사건까지 일으켰다고 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허나 목구멍이 포도청인, 생계형 교사였던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갖은 방법들을 강구해야만 했다.
나는 '닥치고 남중에서 살아남는 법'을 수소문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조언 두 가지를 건져 올렸다. 그 조언이란 아래와 같았다.
첫 번째, 카리스마 있는 첫인상 심어주기. (이건 여학교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두 번째, 서열이 좀 있어 보이는 아이들과 친분 쌓기.
첫 번째 조언은, 학년 초 교사와 학생과의 '기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교사의 기본 매너(?)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카리스마라는 것이 사람을 가린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절실히 갖고 싶어 한다고 내게 기꺼이 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절박한 마음에 일단 노력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두 번째 조언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학급 내 서열 관계를 파악하고자 개학 첫날부터 눈알이 피곤할 정도로 부지런히 아이들을 관찰했다. 한 톨의 자료라도 수집해 보겠다는 연구자의 마음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첫 번째 조언을 성공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두 번째 조언을 실천하는 데 나름 성공했다.
평소 웃음이 적지 않은 편인 나는 아이들 앞에서 가급적 웃지 않기 위해 영혼을 다해 애썼다. 카리스마까진 아니더라도 '카리스마 비스무리'까지는 가보리라 결의를 다졌다. 허나 웃음이 나오려는 상황에서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실로 우주의 기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온종일, 씰룩이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단속하려 몸부림치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소금에 100일쯤 절여놓은 배추김치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내 절박한 몸부림은 '좋지 못한(혹은 더러운) 첫인상'만 남긴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다년간의 교사 생활을 통해 스스로 결론 내린 교사로서의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대화에 꽤 소질이 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교사이자, 나쁘게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다소 만만하게 비칠 수 있는 교사라는 것.
동전의 양면 같은 자질을 지닌 나는 카리스마 굳히기에는 실패했지만, 남자아이들과 호의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선 꽤 좋은 결과를 이뤄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그 무엇'이 첫 번째 조언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했으나 두 번째 실천 항목에서는 장점으로 활약한 것이다.
그 무렵의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얻고자 애쓰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을 잘 파악하고 끌어내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 내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함으로써 장점을 더 큰 장점으로 만드는 동시에, 성과도 없이 지치거나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그래도 나 좀 쓸만한 사람이네.'라는 자기 긍정의 태도를 탑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제법 큰 힘이 되어준다는 점을 말이다.
나의 장점을 활용한다는 것도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힘들었고 때때로 좌절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숨을 내뱉었고 울 것 같은 마음에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에 한참을 홀로 남아있기도 했다. 그래도 이왕 떠나온 출발선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계속 앞으로 디뎌 보자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자 어느 순간, 한 줄기 햇살이 비쳐 들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에 있는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다가 점점 이런저런 제안이나 불만 거리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서열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아이들이) 급식실에서 슬쩍한 젓가락으로 학급 게시판을 구멍 난 다트판처럼 만들고 금요일이면 사고를 쳐서 정시퇴근을 물 건너가게 만드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뻤다.
물론 그 후로도 힘든 순간들은 있었다. 교무실 자리에 앉은 채로 눈물을 쏟았던 적도.
하지만 더 이상 그곳이 야수들의 벌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넓은 곳으로 뻗어나가고 싶지만 좁은 교실에 갇혀 지내야 하는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힘겨움에 조금씩 더 공감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내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 나와 팍팍한 곳에서의 삶을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갔다. 그 마음 하나만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에 내 생애 처음으로 교무실 자리에 앉은 채 울었던 그날도, 눈물을 훔치던 맞은편 여자 동료의 모습을 목격한 어떤 날에도.
그리고, 그해를 겪은 후의 나는 더 이상 중2가 두렵지 않다.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대한민국의 중2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