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90 데시벨이요?
신랑과 나는 결혼하면서 함께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아이 셋 낳기.” 여기서 우리는 흔히 아이 앞에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당연히 아픈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유럽여행 가기,” “아이들과 함께 평생 독자로 살기. 책 읽기,” “50대가 되어도 아이들과 함께 건강하기. 운동하기,” “아이들에게 합창과 악기를 가르쳐 감성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기.” 얼마나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목록이었는지. 그때만 해도 우리는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실현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버킷리스트 어디에도 ‘장애아이 키우기’는 없었다.
"아이 셋 낳기" 외동인 남편은 절대 외동은 안 된다고 했다. 나 또한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성별은 딸, 아들, 딸 정도가 좋겠다. 둘째를 갖고 성별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내가 딸, 아들아이의 엄마가 된다니 그럼 셋째는 딸이 나오겠네?! 하며 매일이 벅찼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참 잘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으면 병원에서는 각종 검사 진행여부를 묻는다. 알레르기 반응 검사서부터 50가지 정도의 검사를 하는데 몇 십만 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비용이 만만치는 않았지만, 나는 사비를 털어 첫째 때처럼 둘째 때도 모든 검사를 받게 했다. 지금은 나라에서 청력검사를 의무화했지만, 둘째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청력검사는 돈을 내야 하는 선택 검사 중 하나였다. 이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신생아실에서 퇴원할 때 간호사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 검사 결과지를 보여주셨다. "산모님, 아이에게 청력검사를 진행했는데, 청력 반응이 없었어요. 'refer'가 나와서 의사 선생님 만나고 가셔야 할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말을 흘려보내고 의사 선생님과 마주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표정이 어두웠다. 차라리 선생님의 표정이 담담했다면 내가 그렇게 좌절하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의 표정은 마치 시한부 판정을 앞둔 환자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아이의 장애는 부모에게 있어 암 선고와 비슷한 충격이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부모에게 있어 아이의 장애 진단과 자신의 암 선고 중 어떤 것이 더 가혹할까?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머니, 아이가 청력반응이 없는데, 이럴 때는 중이염 때문에 일시적일 수 있어요. 여러 가능성이 있는데, 큰 병원에 가셔서 재검을 받으셔야 해요. 저도 이 결과가 틀렸기를 바랍니다."
진료실에 나와 내가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엄마였다. 아들 손주의 청각장애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생각이 하얗게 비워졌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솔직히 마음에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니 현실 감각이 없어졌고, 아예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집에 와 대학병원 검사날까지 '설마 못 듣겠어?' 하며, 냄비를 두드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문을 쾅쾅 닫아 보기를 수차례.. 아이는 소리에 반응할 때도 있었고,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거봐. 반응하잖아. 못 듣는 거 아니네. 아닐 거야.' 무수히 생각했다. 그건 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진동에 반응했다는 것도 한참 후에 알았다. 그 정도로 나는 장애에 관심도 없었고, 더구나 청각장애에는 더욱 무지했다. 신랑과 나의 조상님을 거슬러 올라가도 청각장애는 없었으니깐.
엄마와 통화를 하면 엄마는 맨날 울었다. 그런 엄마를 붙잡고 나는 어느 날부터 하소연하기도 싫어졌고, 엄마도 보기 싫었다. 매번 전화를 걸 때마다 눈물만 흘리는 엄마에게 나는 당분간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함께 슬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엄마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 엄마도 장애아이는 키워본 적 없잖아?' 그런 마음 때문인지 엄마의 위로조차 나에게는 한 방울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내 눈치 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더욱 화가 났다. 그렇게 평소에 기세 등등 한 엄마조차 나의 눈치를 볼 정도의 어마어마한 일이 나한테 일어난 것이 도무지 인정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톡으로 전화로 "힘내, 괜찮아질 거야. 잘 듣게 될 거야."라며 걱정해 주었지만, '내 상황을 모르면서 쉽게 이야기하지 마.'라고 할 뻔했다. 그들의 위로는 오히려 내 마음을 더 거칠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고맙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깊은 저항감과 반항심이 솟아올랐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말들이 내 가슴속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나를 찔렀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이를 건강하게 낳고 키우는 친구들을 보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들이 가진 것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때로는 그 부러움이 가슴속에서 억눌린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듣지도 못하는 둘째 옆에 누워 꺼이꺼이 울어도 내 아이는 깨어나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탄이 차올라,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3개월이 흘렀고, 드디어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진료날이 되었다.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뇌파검사와 청력검사가 진행되었다. 이비인후과에는 생후 3개월부터 10살 되는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생각보다 애기들이 많았다. '저 아이도 청력에 이상이 있어서 왔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미운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우리 순서. 결과는 심도난청, 즉 비행기 소리는 아예 못 듣고, 공사장 드릴 소리(90 데시벨)도 거의 들을까 하는 정도의 청력상태. 우리는 모두 모기소리(5 데시벨)까지 들을 수 있는 건강한 청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 내 아이는 90 데시벨 소리도 안 들리는 '본 투비 청각장애'였다. 의사 선생님은 하도 그런 아이들을 많이 봐서인지.. "보청기 맞추고 가고, 이런 청력은 보청기로도 못 들어. 1년 후에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해야 해." 인공지능처럼 읊어댔다. 몇 개월간 인터넷에서 수집해 본 결과 아이의 청력 반응이 일시적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랬으면 하는 희망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은 다가서 재검을 해보았지만, 내 아이는 보청기로도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 각. 장. 애. 1년 후 귀를 개봉해서 인공달팽이관을 삽입하고 청각보조기기 인공와우를 평생 귀에 달고 살아야 하는 장애인. 결과는 어딜 가나 똑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나는 내 감정을 저 깊이 구겨 넣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첫째가 보는 곳에서나 둘째가 보청기를 끼고 있을 때는 절대 울지 않았다.
우리의 버킷리스트는 새로운 질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 아이는 과연 듣고, 말하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우리의 최선은 무엇일까?'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우리의 계획에 없던 아이의 장애가 앞으로 어떤 길을 열어줄지, 그때는 그것이 또 다른 문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길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 가족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2015년 10월, 막막했던 그때, 나는 그 길의 시작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