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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go Mar 02. 2021

오래된 여행자들

인도 리시케시 생활 이야기

인도 리시케시로 되돌아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오랜 이동으로 피곤했고 나름 적응의 시간을 갖고자 일주일은 오후의 요가 수업 시간 외에는 거의 방에서 지냈다.  밥도 호텔 주방을 사용해서 직접 해 먹기 때문에 더더욱 멀리 나갈 일이 없기도 했다.


위층에 살고 있는 일본 음악가 친구 호시도 있었고 근처에 살고 있는 요가 선생님도 있기에 딱히 적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날도 역시 저녁 요가 수업 후에 간단한 저녁 식사를 혼자 방에서 막 마치고 쉬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망고, 망고’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미니 호시가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인도식 정장 조끼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채 서 있었다. 내일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본 여행자가 있어서 함께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나는 이미 저녁을 먹었고 시간은 저녁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왠지 종일 방에만 있느니 나가는 게 재밌을 것 같아서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몇 명의 일본 친구들이 머물고 있다는 호텔로  따라 들어갔다.


소들의 잠


호텔은 차가 다니는 좁은 오르막길 도로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고 입구를 통과해 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왠지 어두침침해 보였다. 이층에 있는 넓은 홀에서 요가 수업도 할 수 있다는데 먼지가 가득한 담요와 의자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삼층 복도에는 여행자들이 몇몇 살고 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몇 개의 방을 지나쳐 중간에 있는 방을 노크하니 흰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마른 사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지난번에 호시가 음악회를 열었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어서 낯이 익었다. 호시는 함께 온 나를 소개했고 그는 침대가에 의자를 두 개 놓아주고 앉으라며 권하고는 그대로 다리를 쭉 뻗고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긴 은발머리를 하나로 묶어 늘어 뜨리고 겨자색 인도 바지를 입은 그는 밝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도로로 향한 큰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천장에는 방을 가로지를 정도로 길게 빨랫줄을 걸어 놓고 있었다. 밝은 형광등 불빛 때문에 날아들어온 날파리들이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지 그저 무심하게 그는 다리를 꼰 채 누워서 우리에게 웃음을 지으며 세상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이어서 같은 호텔에서 머물고 있는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 여행자가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리시케시 거리


그들은 빠른 일본어를 하고 있기에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호시의 괴성이 들렸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들은 이미 카레와 밥으로 저녁 식사를 막 마친 뒤라는 것이었다. 늘 자유분방하고 세상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호시는 이번에도 의사소통이 잘 안된 것인지 입을 쩝쩝거리며 배고파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은발의 여행자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눈치 더니 곧 신문지에 싸여 있는 커다란 파파야와 과도를 꺼내 침대에서 주섬주섬 신문지를 펴서 쟁반 삼아 파파야를 깎기 시작했다. 파파야 껍질과 씨앗은 옆에 있는 휴지통 속으로 무심히 들어갔고, 플라스틱 그릇 하나를 화장실로 가서 씻더니 파파야를 그릇에 옮겨 담고 우리에게 먹으라며 침대 모서리로 밀어주었다.


아름다운 주황빛을 띄고 있는 알맞게 익은 파파야는 맛있었다. 배가 고팠던 호시는 연거푸 파파야를 입으로 가져갔고, 잘생긴 청년 여행자는 은테의 안경을 고쳐 쓰며 한입 베어 물었다.


멋스러운 은발의 여행자 ( 그의 이름도 호시이다. ) 젊었을 때는 영어 공부를 했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영어 공부를 따로 하고 싶지 않아서 영어로 말하는  어색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당연히 영어 공부를  해야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친구 호시가 내가  영어로 그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으면 그에게 일본어로 대신 물어보고 영어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내일 마날리로 떠난다고 했다.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아름다운 산마을 마날리는 리시케시에서 버스로 16시간이 걸린다. 활엽수가 솟아있고 개울 소리가 들리는 마날리는 공기 좋고 온천도 있기에 휴양지로는 아주 좋은 곳이지만 날씨가 꽤 추워서 5월이 되어야 날이 풀리는 곳인데 아직 2월 말인 지금 굳이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특히 리시케시에서 마날리로 향하는 지옥의 로컬 버스를 여행팀을 인솔하느라 많이 겪어본 나는 다시 같은 길로 가라고 하면 절대 가지 않을 그런 길이기도 했다.


산책 길


그가 지금 묵고 있는 호텔 주인이 바뀌면서 낡은 호텔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서 모든 투숙객들에게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내친김에 그는 온천이 있는 마날리의 바쉬싯 마을로 가서 지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에게 언제 인도로 들어왔냐고 물으니 인도를 오간 지 아주 오래된 여행자라고 해서 이번에 인도로 언제 들어왔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에 인도로 들어왔고 인도 락다운 기간에 델리에서 발이 묶여서 그 더운 여름날에 델리의 작은 숙소에서 4개월을 보내고 리시케시로 들어왔다고 했다.


델리의 메인 바자르 지역은 여행자들이 잠시 머물렀다가 나가는 소란스러운 곳인데 그곳에서 장장 4개월을 보냈다니 믿기조차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머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재차 물으니 옆에 있던 잘생긴 청년이 ‘아이 러브 인디아 소우 머치'라는 단순 명쾌한 대답을 대신 준다. 그러면서 인도에서 머무는 이유가 뭐냐고 나한테 묻기에 나는 인도에 온 지 고작 2개월이 되었다고 답을 돌려 버렸다.


내방의 위층에 머물고 있는 호시와 나는 10년 전에 이곳 리시케시에서 요가를 하며 만난 사이다. 호시는 나를 바라보며 우리도 서로 알게 된 지 10년이 되었다면서 옛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러다가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인도를 오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졌다. 이미 백발이 된 머리를 하고도 인도에서 오래 생활하고 있는 은발의 여행자, 무거운 악기와 스피커를 들고 다니며 인도에서 음악 연주를 하고 있는 호시 그리고 역시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또 다른 청년 여행자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이미 오래된 여행자들이었다.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는 순례자들


은발의 여행자는 갖은 물건으로 어질러져 있는 테이블을 뒤적거리더니 인도 인스턴트 라면 두 봉지와 먹다 남은 양배추 한알 그리고 양파 몇 개를 봉지에 담아 호시에게 주며 위층에 있는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라고 했다. 호시는 그가 준 물건들을 챙기더니 두 손을 합장하며 안전한 여행을 위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라면을 만들러 잘생긴 청년과 위층으로 올라갔고 늦은 밤 혼자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와 베란다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나가서 훤히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크고 밝았고 달의 꺼끌꺼끌한 표면이 느껴질 정도로 잘 보였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소원을 빌었다. 이번에 인도에 온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나를 비롯한 호시 그리고 은발의 사내 또는 아직도 인도에서 길을 헤매고 다니는 모든 오래된 여행자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갠지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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