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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글씨 Nov 23. 2023

상처 둘|나의 꿈을 짓밟아버린 첫 직장

 사람은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진로에 대한 끝없는 고민 끝에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었고, 동경할 수 있는 이를 만나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사회로의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그 설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그때 그 설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에 첫 출근을 한다며 들떠하던 내 모습과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 주던 엄마와 동생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내게도 그렇게 순수하고 말갛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을 견디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나의 첫 직장 생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내 첫 직장은 정신장애인의 사회 복귀를 위한 직업 훈련을 진행하는 곳이었는데 내가 맡았던 한 당사자로부터 불편한 연락이 시작되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시간 되시면 선생님과 꼭 데이트를 하고 싶습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등과 같은 사적인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나는 23살의 어린 사회초년생이자 대학생이었고, 내게 개인적인 연락을 보내온 당사자 분은 50대의 중년이었는데 그때의 난 갑작스러운 연락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민 끝에 직속 상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상사는 내게 '네가 좋아서 그런가 보지, 뭐.'라는 무책임한 말만 늘어놓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는 개인적인 연락은 애써 무시하며 그 당사자 분과 불편한 하루하루를 지내며 업무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부터 연락의 빈도수는 점점 잦아졌고 '선생님과 키스를 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손을 만지고 싶습니다.'등과 같이 발언의 수위가 서슴없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300~400개 이상의 같은 내용의 카톡이 오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카톡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업무를 진행하는 시간 동안 불필요한 스킨십까지 하기 시작했다. 내게 물건을 건네줄 때 굳이 손이 닿지 않아도 될 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을 쓸어내리거나 쓰다듬으며 물건을 전해주었고, 좁은 곳을 지나갈 때는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며 지나가거나 내가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자신의 몸을 앞으로 내미는 등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불편함과 불쾌함 속에서 몇 개월 이상을 견디던 나는 결국 참다못해 그 당사자 분을 직접 담당하던 센터 팀장님과 나의 직속 상사에게 해당 사실을 모두 알렸다. 그제야 심각성을 알음알음 눈치챈 것인지 신경을 써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사자 분의 행동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 수틀리면 앞에선 하하 호호 웃곤 했지만, 본인이 퇴근을 하고 나면 바로 돌변하여 내게 수없는 폭언과 수위 높은 발언, 욕설 등의 카톡을 300개 이상씩 보냈으며 그로 인한 나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하루하루 내 정신이 피폐해져 가던 어느 날,  다음 해 꽃샘추위 때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불편한 하루를 이어가던 날들 중 한 날이었다. 내가 불편해하던 당사자 분과 함께 근무를 하던 시간대였는데, 갑자기 옆에서 욕설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욕의 수위와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흥분한 그를 달래기 위해 당사자 분의 이름을 부르며 진정시키고 잠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는 게 어떻겠냐 권유를 하자 갑자기 주변의 물건들을 던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든 감정은 '무섭다'였다.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들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갈 때, 그 당사자 분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해 주변에 있던 온풍기를 발로 차 내 다리에 던진 후 씩씩 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주변에 있던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겨우 몸을 지탱한 채 센터 담당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이곳으로 올 것을 요청했고, 센터장님에게는 당사자 분과의 즉시 분리를 요청했지만 내 요구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요구를 받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센터장님은 나의 직속 상사와 함께 셋이서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불편한 식사 시간 속에서 난 그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과 담당 팀장님의 일 처리 방식, 그리고 내 직속 상사의 일 처리 방식, 센터의 일 처리 방식 등에 대한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런 내 울분에도 센터장님은 그 어떤 대답도 해결책도 내놓지 않으셨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만약 센터장님 따님께 저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도 센터장님은 제게 하셨던 것처럼 따님께 참으라고만 하실 수 있으신가요?'라는 나의 물음에 센터장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안고 갔던 식사 자리는 그렇게 내가 퇴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난 고작 23살짜리 사회초년생이었고, 누구나 무섭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마저도 끝까지 사과받지 못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는 이도 없었고 상처로 얼룩진 내 첫 직장 생활에 대해 미안하다 사과하는 이조차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수많은 각오를 다지며 걸었던 길이었지만 내 꿈이, 내 첫 직장 생활이 이렇게 상처로 얼룩지길 바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첫 직장에서 마지막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버스에서 참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가진 모든 의문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사과도 받지 못 한 채로, 내 꿈이 짓밟혀 산산조각이 나버린 채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내 일을 사랑했던 만큼 크게 데어버린 상황 속에서 그 어떤 의욕도 생겨나질 않았다. 퇴사 후 한동안은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첫 직장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만 무수히 흘러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참 우습게도 첫 직장은 나의 마지막 월급까지 밀려서 보내주었고, 퇴직금은 퇴사를 한 후 2개월이나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신고를 통해 입금받을 수 있었으며 나의 신고에 첫 직장은 내게 '그것조차 기다리지 못하는 인정머리 없는 애'라며 힐난하곤 했다. 더 이상 떨어질 정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떨어질 정이 있었던 건지 퇴직금을 받아냈던 그날은 여전히 내 인생 최악의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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