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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글씨 Nov 16. 2023

상처 하나|나를 존중해주지 않았던 첫 직장


 스물셋. 꽃처럼 화사하고 싱그러웠던 나의 20대 시절 중 제대로 된 첫 사회생활을 경험한 시기이자 열정이 가득했고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쳤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컸고 하루하루 배우는 마음으로, 또 새롭게 알아가는 마음으로 임했던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 직업을 사랑했던 것만큼 내 안의 빛이 더욱 크게 바래버린 시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하고 있는 직종이 다르지만, 원래의 나는 사회복지과를 졸업한 사회복지사였다. 그리고 그 직업은 누군가의 강요나 현실과의 타협이 아닌 오로지 나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했던 삶인 만큼 누구보다 내 직업을 사랑했고 자부심이 넘쳤으며, '이 일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 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업에도 열심히 임할 수 있었고, 현장 실습을 나갔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뛸 만큼 벅차고 설레기도 했다.


 사회복지는 분야가 굉장히 다양한데, 내가 관심 있었던 분야는 정신보건 사회복지였다. 학기 중에 접하게 되었던 정신건강론의 매력에 빠져 정신보건 사회복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실습도 정신보건 관련 분야에서 진행했고 첫 직장 역시 정신보건 분야에 취업해 내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나의 첫 직장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정신보건 관련 분야였고, 그중에서도 조현병 환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직업재활을 돕는 업무를 담당했다. 사회초년생인 데다 정식으로 정신보건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는 수행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하루 일과를 함께 진행하고 옆에서 관리 및 증상 관찰을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업무라고 생각했다. 사실 첫 직장을 갖기 전, 아니 정신보건 관련 분야에서 현장 실습을 진행하기 이전에는 조현병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현병과 관련한 부정적인 뉴스가 만연하는 세상이었고, 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내 편견을 철저히 깨부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조현병 환자 당사자들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에 내 편견은 깨어졌고,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해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현장 실습 당시에도, 첫 직장을 가지고 근무하던 당시에도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순탄할 것만 같았던 나의 첫 직장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나는 조기 취업으로 인해 학업과 직장 생활을 동시에 병행 중이었고,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가 강의를 듣곤 했는데 문제는 당시의 나는 주 6일을 일했다는 점이었다. 평일은 직장인, 토요일은 학생, 일요일은 다시 한번 직장인으로 생활했던 나는 쉬는 날 없이 같은 일상을 반복하자 결국 지쳐버리고 말았고, 학업과 직장생활을 주말 동안 동시에 병행하기 버거웠던 나는 직속 상사에게 주말 근무 조정을 요청하였으나 반년이나 묵과된 뒤에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주말 근무를 병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급여가 드라마틱하게 높거나 제대로 된 급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첫 급여 이후부터 월급은 매번 밀리기 시작했다. 분명 사회생활을 통해 돈을 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돈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해버리고 만 것이다. 월급이 밀리니 제대로 된 생활이 되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신용카드를 개설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애초에 많은 월급이 아니었던 금액에 밀리기까지 하다 보니 내 월급은 늘 카드 대금과 각종 생활비로 나가기 바빴고, 간신히 남은 돈을 끌어모아 겨우겨우 한 푼 두 푼 모으는 정도밖에 되질 않았으며 그마저도 결국에는 다 깨버리고 마는 최악의 상황까지 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련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내 권리를 제대로 표현해 보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 권리를 내가 찾을 수 있었더라면, 잘못된 부분에 대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더라면 내 첫 사회생활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달라졌지 않을까.


 내 첫 직장은 근무일수로도 또 급여로도 '나'라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내 직업과 내 업무에 대한 애정이 컸던 만큼 실망감과 배신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고, 근무처의 센터장님이 학교의 교수님이었기에 더욱더 목소리를 내는 것에 어려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무엇이 최선인가 하는 끝없는 저울질 속에 나는 미련하게도 ‘참고 견뎌보자’라는 최악의 수를 택하고 말았다. 그 선택이 훗날 내 인생에 어떤 폭풍을 불러일으킬지 알지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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