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몰래 흘린 엄마의 눈물은 너무 깊었다.
엄마는 산재를 당했다고 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산재가 뭔지 알 턱이 없었던 나는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렇지 않게 엄마를 대하는 것, 엄마의 속을 썩이지 않는 것, 엄마가 없는 동안 동생과 씩씩하게 있는 것뿐이었다.
엄마의 입원은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다.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 크게 다친 엄마의 손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엄마의 수술을 진행해 주신 의사 선생님은 절단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엄마와 그 밑에 딸린 나와 동생을 보며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겠다며 엄마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물론 다치기 전처럼 고운 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지만, 어느 정도 기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할 수 있게 함께 노력해 보자고도 하셨다. 엄마의 담당 의사 선생님은 무뚝뚝하셨지만 그래도 엄마를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주셨다.
수술을 마친 엄마의 손은 군데군데 수술자국이 있었고, 커다란 철심을 박아놓은 상태였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낯설고 무서운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감추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마 엄마는 그런 내 감정을 다 읽어내지 않았을까.
나와 동생은 방학 동안에 막내이모 집에 지내며 주기적으로 엄마를 보러 갔고, 학기 중에는 매주 주말마다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갔다. 매일 보던 엄마를 며칠에 한 번씩 보다 보니 애틋함이 더해졌다. 가끔은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병원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엄마는 좁은 병원 침대에서 한 손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그동안 못 했던 얘기를 나누거나 조잘거리는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엄마와 우리들은 다친 엄마의 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서로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엄마가 다쳤다는 것, 병원에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의 병실에서 구슬프게 흐느끼던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아빠와 이혼하고 시골로 갔을 때, 엄마는 항상 문 밖에서 울곤 했다. 꼭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울음을 삼켜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리를 재워놓고 멍하니 병실 소파에 앉아 흐느꼈다. 가까이에서 처음 듣는 엄마의 울음소리였다. 잠자리가 불편해 뒤척이다가도 금세 자는 척을 하곤 했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제 딴에는 엄마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엄마가 속상할까 봐. 그래서 더 울까 봐 자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