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그늘이 지고, 엄마의 얼굴에는 또 다른 그늘이 졌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무서운 사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를 통해 어른들에 대한 예의범절, 밥상예절 등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지만 늘 엄했던 모습에 편히 다가갈 수는 없는 존재였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면서도 할아버지에게는 꼬박꼬박 아버지라 불렀고, 묘하게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할아버지가 내밀어준 손을 잡긴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래 묵혀있던 갈등이 한순간에 해소될 정도로 살가운 부녀지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무뚝뚝하고 엄격한 아버지들의 표본이었다. 자식들에게 엄했던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의 주머니에는 항상 당신이 맛있을 거라고 생각한 계피맛 사탕과 눈깔사탕이 있었고, 가끔 시장에서 사 온 호박엿이 담긴 검은 봉투를 내밀어주시곤 했다. 개를 무서워하던 손녀를 위해 아끼던 검은 오토바이에 태워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고 보고 싶은 걸 보라며 리모컨을 툭 하고 내던져주는, 나름의 다정함이 있었다. 다만 그 다정함을 알아차리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자식들과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을 뿐이었다.
엄마가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우리는 엄마와 있는 시간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할머니는 당신의 딸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애가 둘이나 딸린 이혼녀가 된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그 원망과 답답함을 나와 동생에게 쏟아내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할머니의 신경질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할머니에게 애들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다며 그만 두라 호통을 치시곤 했다. 그땐 그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싸우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마 우리의 그늘막이 되어주겠다던 그 말에 책임을 다해주시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짐작해보곤 한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시골에서의 생활이 3년째 접어들 무렵부터 할아버지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지셨다. 스스로의 거동은커녕,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해 하루종일 누워만 있어 욕창이 생기기도 했고, 대소변조차 제대로 가릴 수 없어 할머니나 엄마의 수발이 없으면 하루 보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고 말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을 열 살, 나는 가까운 이와의 두 번째 이별을 경험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딱 하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엄마의 눈물이었다. 매번 우리의 뒤에서 눈물을 훔치던 엄마가, 밤늦게 홀로 방 밖에서 울음을 삼키던 엄마가 처음으로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엄마의 그늘이 결국은 져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