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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글씨 Sep 28. 2024

네 번째 : 여자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엄마 혹은 여자, 그 사이에서 엄마는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는 빠르게 일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언뜻 한 번씩 느껴지는 빈자리는 공허함을 느끼게 했다. 겉으로 보이는 엄마는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엄마 역시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는 듯 쓸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을 무서워하고 미워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 손을 내밀어준 ‘아버지’였기에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이혼으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홀로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오던 엄마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엄마의 변화가 무엇이다!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었지만 미세한 그 변화를 어린 시절의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그 사실을 나와 동생에게 조심스럽게 알렸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데다 아빠의 빈자리가 컸던 동생은 기뻐했고, 아빠에 대한 추억을 여전히 기억하는 나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비록 아빠가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무책임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동생을 향한 사랑만큼은 거짓이 아니었기에 아빠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어렸던 나는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탐탁지 않았고, 엄마에게 못되게 구는 아저씨의 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내가 기억하던,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아빠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아저씨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박힌 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굴러온 돌이 빈자리에 툭, 박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나와 동생과 가까워지기 위해 꽤 자주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거부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엄마는 내 거부감이 줄어들길 원했지만 오히려 반감만 커져갔고, 사춘기에 접어들고나서부턴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팔짱을 낀 채 엄마와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랑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달그락 거리며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무거운 공기 위를 맴돌았다. 그 어색한 적막함은 엄마의 대화 시도로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리자 엄마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뭐 때문에 그렇게 싫어?’ 하고. 대번에 할 말을 잃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물음에 차마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다. 싫다는 감정은 명확했지만 ‘왜’ 싫은 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밥만 휘적거리자 엄마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물어왔다. ‘얘기하기 싫어? 싫으면 안 해도 돼.‘ 얘기는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신중하게 생각한 후 얘기하자고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칼날이 되어 엄마의 가슴을 갈기 찢어놓기 충분했다. ‘난 평생 엄마가 재혼 같은 거 안 하고 우리만 바라보고 살았으면 좋겠어.’ 난 참 나쁜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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