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으면서
휴일 아침
그제 마신 술 때문인지 어제는 일찌감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작은 싱글 침대. 5월이지만 지난겨울의 두꺼운 이불을 걷지 않았다. 그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가 턱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고 나면 천국이 따로 없다. 더운 날에도 이런 포근함을 버리긴 싫다. 잠결에 더워 이불을 치워버리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포근해야 한다.
몇 시간을 잤을까?
눈을 떴을 때 루틴을 깰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이게 휴일의 맛이다. 아직 바깥은 어둡다. 전화기를 들어 시계를 보았더니 3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다. 일어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눈을 감았다.
알람이 울렸다.
4시 반이다. 어깨를 돌려 고쳐 누웠다. 지난밤 세상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트위터를 켜본다. 여전히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구는 부정하고, 누구는 칭찬한다. 십여분을 그렇게 페이지를 뒤적이다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여느 때와 똑같이 강아지들이 뛰어나와 짖는다. 한껏 꼬리를 흔들며 새벽을 깨운다. 녀석들은 매일 잠에서 깨면 기억이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 아침 처음 만나는 나를 보면 집을 지키려는 듯 짖는다. 그리고는 엄마의 품으로 다시 뛰어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한 녀석을 배를 까뒤집고 만져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꼭 그렇게 손길이 닿아야 다시 잠들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안방 침대에는 아내와 딸이 아무렇게 자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탠드를 꺼두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그들을 다시 밤으로 보낸다.
칫솔에 치약을 짰다. 칫솔이 많이 낡았다. 바꾼다는 것을 계속 잊어버린다. 일어나서 한 번, 잘 때 한 번, 하루 두 번 쓰는 칫솔이다. 짠 치약이 입에 가득 퍼지면서 나는 조금씩 일상으로 걸어 나간다. 양치질을 끝내고 세수하고 나오면서 차가운 물 한잔을 마셨다. 얼마 전 엄마가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냉수 버튼을 누른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이 좋다.
서재에 들어왔더니 지난밤 아들 녀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컴퓨터 책상 위 아무렇게 놓여있는 헤드폰, 몇 개의 컵, 손톱깎이, 양말까지. 불현듯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에휴~하며 치워낸다.
책상에 앉아 스탠드에 불을 켜고 가방을 뒤적여 읽던 책을 꺼냈다.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는 중이다. 지난 주말 도서관 자료실을 서성이다 그의 책을 발견했을 때 뽑아 든 책이다. 그의 작품 중 내가 읽지 않았던 책이기도 했고, 제목도 강렬했다.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야지 생각했던 게 금세 절반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유디트>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밴 여인. 김영하는 이 책에서 몇 개의 그림과 음악을 소개하는데 하나같이 강렬하다. 클림트의 <유디트> 역시 마찬가지다. 2016년 대학원에서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클림트의 <키스>를 직접 보려고 벨베데레 궁전을 찾았었다. 그 날 나는 커다란 <키스> 앞에서 한 시간가량을 넋 놓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진품이 아닌 모사품이라고 했다. 그래도 황금색의 오묘한 그 그림이 좋았다. 그때 옆 방에 <유디트>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장소에서 본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그림을 본 기억은 뚜렷하다.
김영하는 이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덕분에 책 읽는 이 시간이 즐겁다. 휴일 아침 소설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아무런 계획 없는 휴일 아침, 따뜻한 햇살이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들어 책상을 비출 때 나는 책을 통해 상상 속 그 어딘가로 걸어간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서 평소에는 책을 읽지 않다가 여행을 떠나면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는 소설을 읽지 않다가 휴일이나 계획에 없던 틈이 생기면 소설을 읽는다.
그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