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태 Aug 27. 2021

아직도 “아빠”가 더 어울립니다



얼마 전 사무실에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아빠”


이 말로 시작된 몇 마디 통화였다. 조용한 사무실이었는데 내 목소리가 제법 컸었나 보다. 전화를 끊은 지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후배와 농담을 주고받던 메신저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네. 아빠! 정말 애정 넘치는 아들이시네요.”


농담이나 써대던 메신저 화면에서 이 문장을 만난 순간, 갑자기 나는 아버지가 아닌 아빠를 사랑하는 아들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라고 불렀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뭔지 모를 거부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빠"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그 색깔 그 향기 그대로 존재하는데 "아버지"는 본래 아빠에서 잿빛 유리를 씌워놓은 것 같다. 뭔가 조금 더 멀고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라고 할까?



사실 "아버지"라고 불렀던 경우가 가끔 있었다. 물론 요즘도 가끔 주변에 귀가 많으면 "네. 아버지"라면서 전화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럼 언제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결같다.


"어. 아들. 아버지다."


그리고는 약간의 고음 섞인 목소리로 특유의 경상도 남자처럼 용건만 간단히 하시고 전화를 끊는다.



어릴 때는 아빠가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권위적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의 모든 의사결정에 최고의 재량권을 가졌고, 네 식구를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가장이었기 때문에 그 무게감이 나에게는 컸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들처럼 나는 아빠와 많은 것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70년대에 태어난 아이로서 아빠와 부대낌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의례 일요일 새벽이면 나를 깨워 목욕탕을 갔고, 나는 매우 뜨거운 물에서 때밀기 좋게 살갗이 야들야들 해질 줄 아는 아들이었다. 아빠는 머리감기부터 양치질, 때밀기, 비누칠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씻겨줬고, 내 팔 힘이 때를 밀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아빠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이태리 타월을 들고 아버지의 등을 열심히 밀었다.


"와! 아들 이제 제법 힘이 세네."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목욕을 마치고서는 항상 맥콜을 한 병 사주셨다. 차갑고 깔깔한 맥콜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느낌이 좋아서 지금도 목욕탕에 갈 때면 맥콜을 고른다.



1997년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고 6주간의 훈련기간 동안 부모님과 전화통화를 할 수 없었다. 퇴소식 날 저 멀리 서계시는 아빠와 엄마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었다. 남자가 되기 위해 군대에 왔는데 군기도 부모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후반기 교육을 받으면서 전화통화가 허용되었다. 공중전화기에 카드를 넣고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 아들이에요."

"어. 아들 오랜만이네. 건강하제?"

"네 그렇습니다."

"허허. 우리 아들이 군대 가더니 군기가 바짝 들었나 보네..."


이 짧았던 통화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며칠 전, 아빠 연세가 어떻게 되었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자식들의 나이와 내 부모님의 나이를 잊고 있었다. 물론 금세 계산해낼 수 있지만 툭하고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나에게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꾸만 나 스스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어느 순간 이유를 찾게 되겠지.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는 중인데 불현듯 "아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본 사람의 경험이 그 뒤를 이어 살아가는 사람의 디딤돌이 되어준다.


아빠 그리고 나. 사람들은 우리를 닮았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슬쩍 비치는 거울 속 내 모습에서 아빠를 발견하는 것도 닮았기 때문일 거다. 생김새부터 행동, 습관, 말투, 생각에 이르기까지. 돌이켜보면 45년의 내 인생에서 아빠와 함께한 날은 절반이 채 안된다. 물론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장 밀도 있는 시간을 아빠의 그늘에서 보냈기 때문에, 또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의 기원이 당신이기 때문에 닮을 수밖에 없을 거다. 때로는 거부하고,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미워했어도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 아들이네." 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직도 아버지보다 아빠가 더 어울린다.



- 아들 김경태 -


#아빠 #가족 #전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