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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Apr 27. 2020

기분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feat.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  



시시각각 변하는 내 생각과 기분 그리고 순간순간 미묘하게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람 소리에 잠을 깨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일 해오던 나의 루틴을 시작한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고 눈을 비빈다. 이불 속 따뜻한 느낌을 떨치기 싫어 잠시 망설이는 시간 몇 초가 정말 힘들다. 세상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고 했다면 가장 따뜻한 공간은 아마도 이불 속일 것이다.



벌떡 일어나 침대 위 이불을 정리하고 살짝 창문을 열어 침실의 탁한 공기를 빼낸다.


방문을 열고 나와 욕실 불을 켜고, 서재로 가서 서재의 불도 켜놓는다. 서재 옆에 있는 큰 방에는 아내와 딸과 강아지 두 마리가 자고 있다. 내 움직이는 소리에 맞춰 강아지들이 잠을 깨 짖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주인도 못 알아보고 계속 짖는다. 멍멍 소리에 아내가 뒤척이며 강아지들을 품으로 받는다. 



속옷을 챙겨 욕실로 가서 샤워를 시작한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고, 면도를 하고 양치를 하고 뜨거운 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적신다. 물소리 사이로 조금씩 들리는 연주곡의 선율이 참 좋다.


샤워를 끝내고 서재로 돌아와 몸무게를 잰다.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요가 매트에 앉는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한다.



FOCUS라는 자연의 소리 어플을 켜두고 10분간 내 머릿속 생각을 비운다. 하나 둘 셋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끊고 숫자와 호흡에 집중한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스르륵 날려보내기 위해 나를 소리와 흐름에 태운다.


알람이 울리면 10분간의 명상이 끝난다. 잠시 몸을 움직여 간단한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고 서재의 나무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린다. 정면의 모니터 화면이 켜진다. 지금부터 2시간이 나의 새벽 공부 시간이다.





이 새벽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매일 새벽을 기대하지만 또한 매일 이 시간이 버겁다. 



서재 책상에 앉을 때마다 좀 전에 있었던 명상의 느낌을 글로 남겨보고자 애쓴다. 그런데 도저히 그 느낌을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내 언어의 한계인지, 한글의 한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느낌을 명확히 짚어내질 못하겠다. 기껏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위의 글처럼 내 동작을 열거하는 정도다.





색상표를 보면 파란색도 수천수만 가지가 있듯 내 기분도 아래 색상표처럼 어느 한 지점에 점을 찍을 수 있으리라. 물론 이 스펙트럼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긴 하다. 내 기분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분 안에 위치할 것이기에...




예전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책 제목을 보고 놀랬던 적이 있다. 파란색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제목의 영어식 표현은 Almost Transparent Blue이다. 보통 한글이 모호할 때 영어 표현을 보면 명확해지곤 하는데 이 제목은 영어를 봐도 명확해지지는 않는다. 



난 이 제목을 보고 학창시절 미술시간을 떠올렸다. 수채화를 그리겠다고 스케치북, 물감, 팔레트, 물통, 붓을 챙겨가서 책상에 놓아두고 화장실에서 물통에 투명한 물을 잔뜩 받아다 붓을 씻으려고 준비한다. 그 투명한 물에 물에 갠 파란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렸을 때 보이는 물의 색깔, 그 색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일 거라 생각했다.





글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타인의 생각은 무시하고 오로지 내 주관에 따른 내 생각을 때론 과하게 때론 소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즉흥적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약속된 기호로 표현하고 있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약속된 기호 속에서 100% 그 느낌을 발견할 수 없다. 아주 잘 잡아내면 30% 정도 표현되려나?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이, 내 생각을 명확히 표현해 낸다는 것이 실로 어렵다고 하는가보다. 대부분 글을 시작하는 사람이 첫 문장에서 멈춰버린 이유가 아마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역설적으로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떠올려 본다.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1942.6. 3)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당황스러운 사실은 네이버에서 이 시를 찾아보다가 블로그에서 이런 걸 봐버렸다.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

갈래 자유시, 서정시, 저항시
제재 현실 속의 자신의 삶, 내면화된 나
상징적, 의지적, 저항적, 남성적, 지사적, 미래지향적
상징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시적 의미를 강조함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대립과 화해 과정을 통해 시상을 전개함
청각, 시각, 촉각의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함
동일 시행의 반복이 드러남


시험지 오지선다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이런 시의 해설이 이 시의 느낌을 오롯이 느끼는 것을 완벽히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 역시 이 시를 기억하는 이유가 위 해설같은 문장들을 열심히 외운 덕분일 테지만 말이다.


글쓰기 어렵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갑자기 윤동주의 이 시가 떠올랐을 뿐인데...

그 순간 이 시가 떠오른 그 찰나적 느낌을 글로 명확히 잡아낼 수가 없다.


아쉽지만 그래도 계속 써보련다.

쓰다 보면 1% 정도는 더 닿지 않을까?


- 작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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