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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Apr 28. 2020

자신을 마주할 장소가 있나요?

목욕탕에서의 자기발견 이야기



어느 날 마음껏 침잠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깊은 다이빙 풀 속으로 발목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고 내려가고 싶었다. 그곳은 고요하고 맑고 투명할 거라 생각했다. 한 마리의 심해어처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보일 것도 같았다.




열탕과 사우나실



코로나로 목욕탕을 가지 못하는 게 아쉽다. 새벽 목욕탕의 습한 기운은 고요한 새벽만큼이나 무겁고도 잔잔하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이라 물소리만 들린다. 특히 요즘은 사우나를 즐기는 사람이 줄어서인지 새벽 목욕탕은 한산한다. 



강하게 흘러내리는 샤워 줄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적시는 것은 어떤 의미 있는 의식처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 칠을 한 뒤 텅 빈 열탕에 나를 담근다. 43도.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뜨거움의 고통은 이내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시원하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읊조리며 천천히 몸을 담근다. 


열탕에 있는 5분 정도의 시간은 참 길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생각해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내 몸과 뜨거움에 집중하게 한다. 오롯이 내 몸, 내 피부, 내 상태에 집중하는 그 순간. 난 그 순간이 좋다.


잠시 탕 밖에 걸터앉아 몸을 식힌다. 정말 잠시 앉아있었다 싶은데 5분이 훌쩍이다.  


그리고 나는 건식 사우나로 걸어간다. 85~90도 정도되는 그곳은 답답한 곳이다. 특히 새벽의 그곳은 사람이 없고 오로지 스팀기의 소리만 들린다. 문을 열면 훅하고 내 얼굴을 때리는 뜨거운 기운은 마치 한겨울 괌 공항을 나설 때 느낌과 흡사하다. 치익~하는 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나는 7분짜리 모래시계를 돌려놓고 히노키 나무에 엉덩이를 대본다. 뜨겁다. 하지만 이내 그 뜨거움은 내 몸과 하나가 된다. 혼자 이곳에서 머무는 15분 정도의 시간이 좋다. 갑갑하고 다소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뜨거움 때문에 현재의 내 상태만 집중하게 된다. 그게 좋다. 




어릴 때 일요일 새벽 6시면 아빠를 따라 동네 목욕탕엘 갔다. 토요일까지 학교를 다니던 그때, 일요일 아침,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달콤한 시간이었을까? 하지만 아빠는 항상 나를 깨워 어스름한 어둠을 헤치고 한참을 걸어 목욕탕엘 갔다. 아빠가 머리를 감겨주고, 몸에 비누 칠을 해주면 나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 얼굴만 쏙 내 놓은 채로 아빠가 씻고 탕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는 뜨거움에 익숙해졌다. 가끔 동네 어른들께서 이렇게 뜨거운 물에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잘 앉아있다고 대견하다며 칭찬을 해주시기도 했다. 뭔지 몰랐지만 기분이 좋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빠의 날렵한 손놀림으로 이태리타월은 내 몸의 자그마한 때도 남김없이 벗겨냈다. 뜨거운 물에 오래 들어가 있어서 때가 잘 불었다며 때 미는 재미가 있다고 아빠는 항상 말씀하셨다. 내 몸을 다 씻기고 나면 나는 아빠의 때 타월을 받아 아빠의 등을 밀어드렸다. 뜨거운 물을 등에 뿌리고 두 손으로 박박 문질러 때를 벗겨냈다. 아빠의 등판은 참으로 넓었다. 군데군데 나있는 점과 작은 흉터들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아빠 전매특허의 수건 드라이가 시작된다. 두 손으로 수건을 말아 머리카락을 탁탁 치며 머리를 말려주는데 그 타격감이 참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맥콜 한 병을 사주셨다. 처음에는 콜라 같은 것을 마셨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아빠가 맥콜을 마시는 걸 보고 나도 따라서 마셔보면서 그 맛에 익숙해졌다.




지금 나는 혼자 목욕탕에 간다. 얼마 전까지는 아들 녀석과 함께 다녔었는데 녀석은 예전의 나 같지 않은가 보다. 목욕탕 가는 걸 싫어한다. 아니 씻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벽에 나 혼자 목욕탕엘 간다. 내 아버지도 이제 목욕탕을 혼자 다닌다. 내가 함께 살고 있지 않아서다. 가끔 부산에 가도 목욕탕을 함께 갈 시간은 좀처럼 없다. 시간이라고 핑계 대어 보지만 어쩌면 아빠랑 목욕탕을 다닐 때의 그 몸과는 너무 달라진 내 몸을 보여주기 싫어서일 거다. 또, 많이 늙어버린 아빠의 몸을 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목욕탕에 간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내가 움직이는 루틴에는 아버지가 녹아있다. 물론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탕에 앉아있고 사우나에서 인내한다. 



무언지 모르지만 난 그곳이 좋다. 그래서 주말이면 사우나에 가고 싶은 것 같다. 

아버지가 깨우쳐주신 목욕의 즐거움을 이젠 내가 더 집착하는 듯한다. 


마치 목욕탕에서 내 안의 무언가를 찾을 것처럼 말이다.


- 작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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