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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후루 Nov 11. 2015

출근길의 비극


아. 이게 참, 뭐랄까요. 오늘 아침에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출근을 하잖아요. 그게 안국역이었던 것 같은데, 배가 많이 부른 임산부 한 분이 지하철에 타더라구요. 그리고 노약자석으로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랬더니 노약자석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여기 앉아요.' 하시며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그 임산부는 밝게 웃으며 '아. 괜찮아요. 할머니. 앉으세요.' 하며 사양을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할머니께서 끝내 양보를 하시자 결국, 임산부도 미안해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행히 다음 역에서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내리셔서, 임산부가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할머니를 살갑게 챙겼지요.


그렇게 임산부와 할머니는 함께 나란히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아. 저는 그때 바로 그 두 분의 앞에 서 있었지요. 전 오랜만에 보는 훈훈한 광경에, '그래. 아직 사람 사는 정이 남아있구나. 특히,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의 저런 친화력은 참 신기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두 분은 서로 어깨를 꼭 붙인 채 '몇 개월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힘들진 않은 지' 뭐 이런저런 대화를 따뜻하게 나누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녀 사이처럼 보일 정도였지요. 오가는 대화를 듣다 보니 할머니는 충무로역에서 내리고, 임산부는 좀 더 가서 신사역에서 내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지하철이 충무로역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임산부가 할머니께 '어머. 할머니 충무로역이네요. 어서 내리셔야죠.' 하며 친절히 알려주었지요.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니야. 괜찮아. 시간이 아직 많아서... 신사역까지 가지 뭐. 말동무나 하면서.'라고 하며 가만히 앉아 계셨습니다. 임산부는 당황하며, '너무 멀리 가시는 걸 텐데, 괜찮으세요?'라며 만류를 하려고 했지요. 그렇지만 할머니는 조금 조심스럽게 '아. 괜찮아. 천천히 돌아오면 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지하철의 문은 닫히고, 충무로역은 멀어져갔지요.


그런데요. 그 순간 임산부가 할머니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주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거였어요. 그 살짝 일그러진 표정이 저에겐 뭔가 소름 끼치는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따뜻하기만 했던 일상에 찌직 균열이 가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리고는 두 분 사이의 대화는 없어졌습니다. 임산부는 정면만 본 채 한숨만 쉬었습니다. 갑자기 두 분을 잠식하는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불편하게 느껴져, 저는 옆으로 조금 이동해 잠시 등장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웠지만, 전 두 분이 모두 이해는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비록 다시 먼 길을 돌아와야 하지만, 이 새롭게 만난 말동무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나누고 싶으셨나 봅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리우셨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임산부는  그분 나름대로 얼마나 피곤하셨겠어요. 출근길에 잠깐만이라도 눈을 붙이고 조용히 쉬고 싶었을 테지요. 사실, 저도 출퇴근길에 우연히 회사 동료가 보이면 슬그머니 피하곤 하니까요. 물론 회사 동료도 저를 피하는 것을 보긴 했습니다만.



아. 사람 사이란 어쩜 이리도 위태로운 걸까요. 우리가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건, 안국역에서 충무로역까지 딱 3 개역 정도인 걸까요.     


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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