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이식 미니벨로를 타는
그분을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아니, 운명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몇 년 전이었습니다. 잠시 백수였던 시절이었지요. 주 3일 연기학원을 다니며 한량 같은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매일 유업의 카페라테를 마시며, 평일 낮에도 한가롭게 동네를 거니는 '아. 좋구나.' 시절이었지요.
그 날은 연기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낮 2시에서 3시쯤이었나요. 학원이 2시 정도에 끝났으니 아마 그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원 앞에서 녹색 버스 7737을 타고 저희 동네에 무사히 도착했지요. 그런데 정류장에 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아저씨가 한 분 있지 않겠습니까.
마른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뚝 솟은 큰 키에 백발과 흑발이 고르게 섞여 회색빛이 도는 장발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고, 사막의 바람이 만든 것 같은 얼굴 주름과 어둡고도 강렬한 눈빛이 범상치 않은 아저씨였습니다.
뭔가 '고뇌'란 단어가 형상화되면 그런 모습일까요. 그래요. 맞아요. '카리스마'. 그게 있었어요.
심지가 약한 전 그분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지요.
그러다가 그 날은 날씨도 좋고 해서, 집에 바로 가고 싶지가 않았어요. 남는 게 시간인데, 뭘 할까 궁리를 하다 가까운 서점에 가보기로 했지요. 근처 대학교 안에 있는 서점인데, 방학 때라 학생도 별로 없고 여유롭게 책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당연히 소설 신간 코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뭐가 있나 한 번 보자.' 하면서 둘러보는데, 녹색의 아주 인상적인 표지가 눈에 띄지 뭐예요.
띠 표지에 적힌 화려한 수상 실적이 군침을 돌게 했습니다. 제목을 보니 '어떤 작위의 세계', 참 독특한 제목이구나 싶어 표지를 슬쩍 넘겨보았지요.
아니. 그랬더니 작가 소개란에 아까 정류장에서 봤던 그 아저씨가 떡하니 저를 노려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와! 이런 신기한 일이 다 있나!'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정영문'이란 작가였습니다. '어쩐지 예술가 같더라니.' 하며 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지요.
아무래도 인연 중의 인연인 것 같아 그 책을 바로 샀습니다. 마치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쓴 책을 산 것 같은 뿌듯함이 감미롭게 흘렀습니다.
그 책은 참 새로웠습니다. 기이하다고 할 만큼 특이한 소설이었습니다. 제가 많은 소설을 봐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스타일이었습니다.
'아.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했더랬지요. 뭔가 뚜렷한 서사도 없고, 그냥 말이 나오는 대로 적은 것 같은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이런 비유가 맞는지 자신은 없지만, 마치 짐 자무시 영화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동네에서 그분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전 당신을 안답니다. 책도 잘 읽고 있어요.' 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그분은 큰 키에 맞지 않는 접이식 미니벨로를 타고 스윽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와 눈을 마주친 적은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전 왠지 다음 소설에 제가 등장하지 않을까라는 가정 속에 빠져들면서, 과연 저 작가는 나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설레발 가득한 몽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분의 소설에는 거리나 공원 같은 곳에서 우연히 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거든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분이 저희 동네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자, 제가 왠지 아주 느낌 있는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뭐예요.
주변에 예술가가 사니까, 나도 왠지 예술가가 된 것 같은 그런 어이없는 착각이랄까요. 그래서 그분을 마주칠 때마다 전 묘한 연대감을 느꼈습니다.
'허허. 오늘 구름이 좋네요. 그렇죠? 예술가는 어쩔 수 없나 봐요. 이런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끼니. 허허.'라며 마음의 대화를 나누곤 했던 것입니다.
한편, '어떤 작위의 세계'는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었기에, 전 그분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바셀린 붓다',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제목이 저마다 특이하더군요. 모두 재밌게 봤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에 그분을 동네에서 본 적이 없네요. 다른 곳으로 이사하신 걸까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