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저에게는 한 가지가 있답니다. 이야기는 보라색 장갑 한 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때는 몇 년 전, 회사 일로 일본의 홋카이도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러브레터'를 보며 참 아름답구나! 동경해왔던 곳을 직접 가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홋카이도는 실제로 눈이 많이 내렸고, 과장을 조금 보태서 온 세상이 투명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투명한 곳이라면 사랑이 눈에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며 오글거리는 감상에 빠지기도 했지요.
낮에는 광고 촬영을 하고 밤에는 주로 일행들과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술도 마시곤 하며 왁자지껄하게 보냈지요. 저만 빼고 전부 술꾼들이라 참 많이도 마셔댔지요. 일본 현지인 두 명은 금세 녹다운되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로컬 가이드 분이 정말 맛있는 고깃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부푼 기대를 안고 종종걸음으로 눈길을 해쳐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는데, 눈 덮인 길바닥에 장갑하나가 떨어져 있더군요. 멈춰서 자세히 보니 손목 부분엔 부드러운 털이 달린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보라색 여자 장갑이었습니다. 아직 깨끗한 걸 봐서는 떨어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주워가긴 그렇고 그냥 두고 가긴 애처로워 보여 잠깐 망설이다, 차갑게 외면하고 가던 길을 갔지요.
그리고 잠시 후 고깃집이 있는 번화가에 이르렀을 때, 어느 여자 한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꽤 예뻤지요. 볼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붉게 칠한 얼굴이 아주 귀여웠습니다. 이곳의 화장법인가 했지요.
그런데 그 여자 분이 가방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데 한쪽 손에 길바닥에 있던 그 장갑이 끼워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전 저도 모르게 여자의 손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어!'하는 촌스러운 소리를 냈지요. 그 여자 분은 뒤지던 손을 멈추고 저를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로컬 가이드가 오는 길에 그 장갑 한 짝을 봤다며 설명해주자, 여자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로컬 가이드가 왜 찾으러 가지 않느냐고 묻자, 원래 그 장갑은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건데 좀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으니 굳이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그럼 우리와 함께 고기나 먹으러 가는 게 어떠냐고 칠칠치 못한 제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자 분이 흔쾌히 좋다고 해서 우연하고도 묘한 술자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로컬 가이드의 통역에 의존하여 서툰 대화들이 오고 갔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연애 조언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뭔가 재밌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자리였지요.
그 자리의 남자 중에 제가 가장 어렸고 마침 그 여자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아, 사람들은 괜스레 저와 연결하려는 분위기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아주 난처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싫지가 않았습니다. 뻔뻔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란 누구나 꿈꾸는 에피소드 아니겠습니까. 너무 비난하지는 마십시오.
아무튼, 단둘이 건배도 하며 저 혼자 만은 사랑의 시작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여자 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로컬 가이드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급하게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전 정말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로컬 가이드가 한 마디로 정리해주었습니다. '장갑'.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모두 붉게 물든 얼굴로 '소 데쓰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전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술기운 덕인지 가슴이 뜨끈해지기도 했습니다. 역시 홋카이도는 사랑이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했더랬지요. 차가운 눈이 사랑을 꽁꽁 냉동시켜서 그런 걸까요. 금성무가 이곳에 왔다면 만 년의 유통기한을 가진 사랑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너저분한 농담도 떠올렸습니다.
아무튼, 그날 밤에도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고, 우리는 추워서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몸을 벌벌 떨며 길을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보니 장갑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여자 분이 가져간 것이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한 짝은 어차피 소용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손은 늘 남자 친구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아. 주책없네요.
네. 전 눈이 오면 보라색 장갑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