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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by 유후루


조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의 일이지요.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동네 자주 가는 과일 가게를 찾았지요.

다섯 평 쯤 될까요. 짧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조그만 가게인데, 과일의 종류는 많지 않습니다만 철에 맞춰 신선한 과일들을 조금씩 들여놓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선홍빛의 예쁘게 생긴 복숭아들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과일이거든요. 하지만 전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가격을 물어보았습니다. 여섯 개가 들어있는 상자 하나에 만 오천 원이었습니다. 대단히 비싼 가격에 전 휘청하였습니다.


요즘에 생활비가 아쉬운 상태거든요.


그래서 전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대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검토해본 결과, 수박이 만 오천 원, 천도복숭아가 네 개에 오천 원, 참외가 세 개에 오천 원이었습니다.


가격 대비 양을 봤을 때 물론, 수박이 가장 좋은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복숭아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천도복숭아도 복숭아가 아닌가. 만 원으로 천도복숭아 네 개, 참외 세 개를 구매하면 두 종류의 과일을 즐길 수 있으니 참으로 풍족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을 타일렀지요. 하지만 자꾸 복숭아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보송보송한 껍질 속에 감춰진 터질 것 같은 과즙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손으로 잡고 먹다 보면 과즙이 손을 타고 손목까지 흘러내리곤 하지요. 그것도 아까워 추접스럽게 혀로 핥아 먹곤 하지 않습니까.


전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가게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주인 할아버지는 인자한 표정으로 저의 선택을 기다려 주셨지요.


전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복숭아 상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전 깨달았습니다. 복숭아는 살 수밖에 없는 과일이라는 것을요.


저의 선택에 확신을 갖지는 못한 채 계산을 위해 카드기에 서명을 하려는데, 만 오천 원이 아닌 만 사천 원이 찍혀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놀라며 '깎아 주신 건가요?'하고 묻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네'라고 하셨습니다.


은근슬쩍 깎아 주셔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과육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오로지 껍질만을 벗겨낸 후, 한 입 베어 문 복숭아는 끝내주게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다섯 개가 남았다는 것이 절 기분 좋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별일도 아닌 것을 너무 호들갑 스럽게 적은 것 같아 부끄러워 지네요.


하나 더 깎아 먹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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