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걸까.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어. 그저 너를 처음 봤을 때 만 떠올라.
때는 고3에 갓 올라왔을 무렵. 봄.
너는 급식 수레를 끌고 있었어. 친구들과 함께. 뭐가 그리 신났는지 깔깔대며 선두에 서서 수레를 끌고 있었지. 반찬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제육볶음이었니?
반하지는 않았어. 그냥 햇살이 유난히 하얗게 비췄을 뿐이야. 너한테만.
며칠 뒤, 고3 특별반 소집 날. 난 보았어. 네가 아이들 속에 있는 것을. 성적도 우수했던 너.
귀를 쫑긋 세웠어. 특별반 관리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너의 이름을 듣기 위해. 그때 잘못 듣는 바람에 한동안 너의 이름이 조은지인 줄 알았지 뭐야.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면 우린 특별반에 모여 자습을 했지. 하필, 내 맞은편이 너의 자리였어.
마주 보고 있지만, 얼굴은 볼 수 없었어. 얼굴이 다 가려지는 독서실 책상이었잖아.
하지만 책상의 아랫부분은 뚫려 있어 너의 슬리퍼는 볼 수가 있었어.
오해하지 마. 보려고 본 건 아니야. 지우개를 줍다가. 정말이야.
때가 탄 하늘색 삼선 슬리퍼.
책상 밑에 그 슬리퍼가 보이면 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너를 상상했지. 기출문제를 풀고 있을까? 아니면 엎드려 자고 있을까?
만약 슬리퍼가 보이지 않으면, 걱정됐어. 왜 안 오지? 오늘은 일찍 갔나?
그러다 문이 열리고 슬리퍼를 살짝 끌듯이 걷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난 알 수 있었어. 하늘색 삼선 슬리퍼가 왔다는 것을.
너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참 많이 했어. 방법은 정하지 못했지만 시기는 정했지. 대학 합격 발표가 난 다음 날. 멋진 고백을 위해선 무엇보다 수능을 잘 보는 것이 중요했어.
공부에 매진하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자꾸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게 있었어. 그 고릴라 같은 녀석.
특별반이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틈만 나면 너에게 장난을 걸고 친한 척을 해댔지. 너의 하늘색 삼선 슬리퍼가 자주 자리를 비우고, 둘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 걱정되긴 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어.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그놈은 나한테 안된다고 생각했거든. 고릴라 같은 놈.
수능은 그럭저럭 성공했어. 긴장을 많이 해서 화장실에 자주 가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어.
그리고 나에겐 고백만이 남았던 거야. 나의 숨겨왔던 마음을 전하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실 너도 날 좋아했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매일 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지.
한 창 기대감에 들떠 있던 난 그 날 하굣길에서 본 너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 고릴라 같은 녀석과 손을 잡고 가던 너.
하굣길이어서 참 다행이야. 등굣길이었다면 난 학교에 가지 못했을 거야.
그날 밤엔 가슴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내 이불이 고생을 많이 했어.
너에게서 졸업하지 못한 채로 고등학교 졸업은 점차 다가왔어.
책이나 소지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본 특별반엔 이산화탄소도 없고 아이들도 없었지. 의자들은 야윈 채로 덩그러니 비어 있었어.
다 풀지도 못한 문제집 몇 권을 챙겨 나오려는데, 슬리퍼가 보였어. 하늘색 삼선 슬리퍼.
넌 자리에 없는데 하늘색 삼선 슬리퍼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무릎을 구부려 앉아 슬리퍼를 자세히 들여다봤어.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지.
삼선 부분이 살짝 떨어져 있었어. 넌 발을 조금씩 끌면서 걷잖아. 그래서 오래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내 자리로 돌아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놨어. 너의 하늘색 삼선 슬리퍼와 나란히 마주 보게 말이야. 검은색 삼선 슬리퍼. 넌 나의 슬리퍼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슬리퍼 없이 흰 양말만 신은 채로 걸으니 저절로 까치발이 되더라. 겨울의 복도는 참 차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