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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시설들은 백수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

by 유후루

백수가 되어보니 느낀 점이 있다. 복지 시설들은 백수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집 바로 근처에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체육센터가 있다. 걸어서 오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직장에 다닐 때는 이곳을 이용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백수가 되고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돌다 보니 이곳에 대해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기대한 것보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시설도 좋았다. 웬만한 취미와 운동은 모두 즐기고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평일에 프로그램들이 집중되어 있고, 직장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저녁이나 주말에는 프로그램이 빈약했다. 결국, 나 같은 백수나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피아노와 수영 강습을 신청했다. 한가로운 오전에 피아노를 치고 수영을 할 수 있었다. 피아노는 금세 질려서 삼 개월 정도만 배웠고 수영 강습은 팔 개월 정도 다녔다. 피아노와 수영 강습을 받는 사람 중에 내 또래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고, 주로 중년이나 노년의 여성분들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이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이 주부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백수가 되고서 알았다. 그전까지는 늘 책을 사서 보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고 보관할 공간도 부족했다. 이제 책을 빌려서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혹시 근처에 도서관이 있나 검색해보니 의외로 코앞에 있었다. 방문해보니 시설도 쾌적하고 책 종류도 부족하지 않았다.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계속 책을 대출해서 즐겁게 읽고 있다.


이것의 장점 중 하나는 색다른 책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매해서 읽을 때는 실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선택이 보수적으로 된다. 기존에 선호하는 작가나 장르, 수상실적 등에 따라 고르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책을 대출해서 읽는 건 실패의 부담이 적기 때문에 전에는 읽어보지 않았던 특이한 주제나 신선한 작가의 책을 시도할 수 있다.


근처 중랑천의 자전거 길이나 농구장 또는 배드민턴장 등의 공간을 평일 오후에 한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이런 곳도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직업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하고 쉬는 시간은 대부분 겹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서 떨어지기가 쉽지 않다. 출퇴근도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함께다. 사람들 저마다 일하고 쉬는 시간이 제각각이라면 세상이 덜 붐빌 텐데. 아마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 내는 사람들이 정작 이러한 복지 시설들을 여유롭게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퇴근 후의 저녁이나 주말에 누릴 수 있는 다양한 복지 혜택들이 늘어난다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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