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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Dec 04. 2020

혼자서 걸어가는 길

Part2. 어떻게 단 한 번도 안 싸울 수가 있어 _ 비결 _ 정서


혼자서 걸어가는 길


 대학 수업에 비교하자면, 결혼은 그룹과제고 비혼 가족은 개인과제 스터디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개인과제를 열심히 하다가, 어느 날 그룹과제를 해야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그 그룹과제가 조금 이상하다.


 조원 A는 그룹과제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개인과제에 추가점수도 준다. 그룹과제를 하니 개인과제에 더 큰 책임감이 생기겠다는 것이 그 이유다. 조원 B에게는 그룹과제가 생겼으니 개인과제는 낙제를 줘도 괜찮다고 한다. 개인과제 때문에 그룹과제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A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과제하느라 건강까지 나빠졌는데도 B는 그룹과제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사실 학칙으로는 A 대신 B의 이름을 쓸 수도 있게 되어있지만, 어쩐지 99%의 사람이 A의 이름을 붙인다.


 조원 A를 남성, B를 여성, 그룹 과제 결과물을 (사회적 의미의) 정상 가족 혹은 자녀라고 치환하고 다시 보자면 참 이상한 과제다. B로 태어난 이들 중에 이 이상하고 불합리한 그룹과제를 하지 않기로 하고, 개인과제에 집중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룹과제를 수행하기에 어려서부터 으레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꼭 필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나아가 그룹과제의 존재와 과정 자체가 유해하고 건강하지 않다고 외치고 이를 타파하려고 한다. 그 목소리가 모여 실제로 제도가 바뀌고 인식이 바뀌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짜릿함이 척추 아래부터 머리 끝까지 타고 올라온다.


 혼자서 걸어가는 길은 힘든 법이다. 개인과제에 매진하는 수많은 B들, 즉 비혼 여성들은 동네에서, 온라인에서 커뮤니티를 이뤘다. 그룹과제를 수행하기로 선택한 A와 B가 결코 반반일 수 없는 기여도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각자의 개인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함께 잘 살도록 서로 응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아를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아를 위해 산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알고, 타인이 내 인생의 핸들을 쥐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또, 타인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고 철저히 조연으로 행동한다. 이 이야기는 1인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의 인생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주인공과 영감을 주고받고 함께 성장한다. 모진 풍파를 헤쳐 나오는 방법을 공유하되 스스로가 빠져나오도록 기다려준다. 신파도 비극도 아닌, 한 편의 성장드라마와 같은 인생이다.






K-정서 : 부채감 가득한 사랑에서 벗어나기


 나는 서울 딸이다. 인천에서 자라 20살이 되던 해에 상경했다.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 반, 차를 타면 45분. 마음만 먹으면 못 갈 거리는 아닌데 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명절이나 생신 같이 큰 행사에만 찾아가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지만, 인간관계라는 점은 똑같다. 만나서 즐겁거나 유익하거나. 둘 중 하나는 충족이 되어야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에서 어머니는 어마어마하게 바쁜 와중에 담갔다며 김치 한 봉지를 내미셨다. 한두 해에 한 번쯤 이렇게 김치를 품에 떠밀려 받아온다. 감사한 마음보다는 부채감이 크다. 얼마나 힘들게 나를 키웠는지, 아버지와 시가와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항상 돈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들었던 이야기의 부피만큼 부채감이 가슴을 누른다.


 좋은 딸이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매번 오랜만에 집에 찾아가면 실망을 하고 오기를 수차례다. 나의 성취는 평가의 대상이 되고 고난은 모두의 별 것 아닌 일이 된다. 그리고 부푼 꿈이 덧입혀져 풀어놓은 미래의 계획은 부정된다. 궁금증이 해소될 만큼, 최소한의 정보만 이야기하게 된 지 꽤 되었다. 연봉도, 친구들의 이야기도, 심지어 사는 곳의 정확한 주소도 부모님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서울 딸이다. 사춘기에도 멀쩡하다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상경하며 미지의 존재가 된 그 딸 말이다. 가족에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하고, 그토록 주야장천 하던 연애도 때려치웠다고 하고, 아버지의 기분을 살피지 않는다. 착실히 살아온 만큼 착실히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당신들과 비슷하게 살기를 원한 모양이다. 하지만 딸의 인생은 그분들이 상상한 것과 아주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룸메이트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하니 당황스러우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어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란 부채감과 같은 표현인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너에게 해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은 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니. 한국 고유의 정서, 즉 K-정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넘어 사회가 이 부채감으로 굴러간다. 결혼을 알리며 밥을 사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의금을 내고, 당신의 딸은 언제 결혼하냐며 축의금을 돌려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이름과 금액을 기록하고 다음 경조사 때 비슷한 금액을 챙긴다. 서로 빚을 지고 빚을 갚고 또 빚을 지고 또 갚는다. 우리가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인생을 갈아 넣어 가며 키웠으니, 우리가 꿈꿨던 미래를 보여주지 않겠니. 고된 베풂의 과정이 있었으니 무언가 돌아와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딸은 단호하게 노를 외쳤다.


 숨이 막힐 듯한 대화를 간신히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 룸메와의 관계는 부채감 가득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아낌없이 위해주는 우정의 관계다.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까지 했는데, 하며 억울해하거나 아쉬운 경우는 없다. 본인이 곤란한 정도의 시간과 정성과 금전을 쏟지 않는다. 딱 편한 만큼의 거리에서 자유롭게 숨 쉬고 편안하게 대화한다.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생색을 내며 언제든 내어주고, 친구가 내어주는 것은 티 나게 고마워하며 받는다. 베풂과 고마움은 빗물처럼 스며들어 우정의 땅이 단단해지도록 돕는다. 10년 간 변함없이 그 생색과 고마움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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