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옷에 가두지 않기 운동
남성복 매장에서 쇼핑하기
하루는 ZARA 남성복 코너를 구경하다가 코트 안감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한 코트는 몸통과 팔 부분이 다른 색깔의 안감으로 배색되어 있었고, 다른 코트는 바깥주머니 4개에 안주머니가 2개였다. 코트 겉면은 부드러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 층 내려가 여성복 코너를 둘러보니 안감은 바스락거리는 싸구려 질감의 천인 데다가 겉면도 뻣뻣하고 거칠기 짝이 없었다. 바깥주머니는 막혀있고 안주머니는 달려있지도 않았다. 가격은 오히려 여성복이 조금 더 비쌌다. 남성복은 같은 가격대의 여성복보다 훨씬 좋은 원단을 쓰고, 마감처리도 튼튼하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남성복 매장만 찾아다녔다. 지금 정착한 곳은 홍대 인근의 남성복 전문 보세 매장이다. 옷가게 사장님은 몹시 친절하고 키와 체형이 나랑 거의 비슷하다. 이곳에서 나는 디자인만 보고 옷을 고를 수 있다. 사이즈는 무조건 맞다. 원래도 쇼핑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아 자주 찾지는 않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계절이 바뀔 때 옷을 장만하러 들른다. 원하는 옷의 종류를 말하면 그중에 내가 원하던 디자인이 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그래서 마음 편히 들를 수 있다. 심리적, 금전적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여성복의 불합리함을 타파하고자 하는 여성복 쇼핑몰과 여남공용 쇼핑몰이 여러 개 생겼다. 여성복은 왜 주머니가 작을까? 왜 소재가 싸구려일까? 왜 사이즈의 선택폭이 좁을까? 성적대상화 없는 여성의 옷은 없을까? 이런 고민에서 탄생한 브랜드들이다.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자
금붕어를 어항에서 키우면 작은 사이즈 그대로 있지만, 연못에서 키우면 팔뚝만 하게 자란다. 여성복에서 벗어난 나의 몸도 큰 물을 만난 금붕어처럼 점점 커져갔다. 옷에 내 몸을 구겨 넣지 않아도 되자, 어깨가 펴지고 자세도 곧아졌다. 편한 옷으로 입던 티셔츠의 어깨가 어쩐지 찡기는 느낌이 들자, 예전에 입던 옷들을 하나씩 입어봤다. 남성복을 처음 알게 된 후 산 스몰 사이즈 긴팔티셔츠, 품이 낙낙한 SPA 셔츠, 여성용이라 어깨가 좁아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한 비싼 겨울 코트, 제일 큰 사이즈를 찾아 백화점을 두세 바퀴 돌아 구한 면접용 정장… 분명 다 내 몸에 들어갔던 옷들인데 이제는 어깨에 걸쳐지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져버렸다. 나보다 키가 최소한 15cm는 작고 마른 체형의 친구들에게 옷을 나눠주자, 하나같이 이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녔냐며 놀랐다.
사실 내 옷을 가져간 친구들도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남성복을 알게 된 후에 옷장을 한 차례 바꿨다고 했다. 거기에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어 뿌듯했다. 사실 작지는 않았다. 사람 하나 들어갈 옷 무더기가 최소 대여섯 번은 나왔다. 대체 그 작은 옷장에서 뭐가 그렇게 끊임없이 나오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 신기한 건, 그렇게 빼내고 빼내도 원래 있던 옷의 부피는 크게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지금은 옷과 옷 사이에 여유가 생길 정도로 미니멀한 옷장을 유지하고 있다. 미니멀한 옷장이 가능한 이유도 주로 남성복을 입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든, 미팅이 있든, 친구들과 만나든, 장례식장에 가든(결혼식장엔 가지 않는다), 크게 착장이 바뀔 일이 없다. 게다가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며 아무 때나 현장에 가서 아끼는 옷에 구멍이 나거나 톱밥과 금속가루가 범벅이 된 후에는, 점점 입는 옷이 단순해졌다.
여름에는 까만 티셔츠 여덟 벌과 시원한 소재의 바지 세 벌을 사서 돌려 입고, 그 위에는 날씨에 따라 반팔 셔츠나 얇은 긴팔 셔츠를 걸쳐 입는다. 겨울에는 도톰한 정도에 따라 바지를 서너 벌 돌려 입고, 위에는 터틀넥 내의에 맨투맨이나 셔츠를 입는다. 봄가을에는 여름에 입었던 반팔티 위에 도톰한 셔츠를 입고 다닌다. 까만 바지만 계절별 소재에 따라 열 벌 정도, 티셔츠 한 다스 정도, 홍대의 단골 옷가게에서 산 10벌 미만의 캐주얼 셔츠, 똑같은 디자인의 여름 양말 10켤레, 겨울 양말 10켤레, 겨울용 겉옷 몇 개… 아무튼 복잡해지기 어려운 옷장 구조다. 옷장을 갈아엎으며 그동안 입지도 않고 맞춰 입기도 어려운 옷을 몇 벌이나 사고 버렸는지 반성했다.
몸에 근육이 붙어 덩치가 커진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요새는 삼각근을 키우려고 애쓰고 있다. 까만 티셔츠를 입은 걸 뒤에서 본 모습이 꽤 멋지다는 생각을 한다. 옷이 맞지 않으면 새로 사면 된다. 친구들과 같이 운동을 해서 서로 작아진 옷을 물려주는 것도 좋다. 나도 나에게 작아진 옷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