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직장인의 옷장 들여다보기
FREE 사이즈가 정말 모두를 위한 사이즈인가요?
미용실 유랑민으로 살았던 기간(컷트 3.3만 원부터 만 원까지, 미용실 유랑기) 보다 더 긴 기간을 옷가게 유랑민으로 살았다. 대학에 간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학교 앞 옷가게에 들어가 구경을 하는데, 가게 점원이 본체만체하는 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했는데, 다음에 들어온 손님은 따라다니면서 옷 추천을 해주고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게 정말이지 눈에 띌 정도였다. 언제부터 FREE 사이즈가 44~55반까지 입을 수 있는 ‘자유로운’ 사이즈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사이즈를 벗어나 보이는 고객에게는 가차 없는 것이 보세 시장의 세계였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싫어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이 사이즈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커서 이상한 핏이 나오고, 누군가에겐 작아서 몸을 욱여넣을 수도 없는, 빼빼 말라야지만 ‘여리여리’ 핏이 나와 우리에게 운동할 자유와 먹을 자유를 빼앗아간 FREE 사이즈.
그래서 쇼핑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였다. 어디든 가서 내가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과 무관하게, 사이즈만 맞으면 뭐든 들고 나왔다. 남성복 시장을 알게 된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것은 ‘보이프렌드 핏’이었다. 남자 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옷차림. 물론 내가 입으면 보이프렌드 핏이 아니라 그냥 보이가 되는 옷이었다. ‘이럴 바에야 그냥 남자 옷을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SPA 매장을 가도 여성복과 남성복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방어막이 쳐져 있다. 방어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자라면 여자 코너에서 옷을 사시오. 남자라면 남자 코너에서 옷을 사시오.> 그래서 선을 넘어 남성복 매장에 들어가더라도 그건 남성을 위한 옷을 골라주기 위함이었지, 내가 입을 옷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나요?
처음으로 산 남성복은 스몰 사이즈였다. 여성복은 대체로 몸에 붙게 입도록 되어 있고, 남성복은 슬림핏 셔츠가 아닌 바에야 헐렁하게 입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여성복을 고른다는 생각으로 샀으니 몸에 붙는 사이즈를 고른 것이다. 내내 몸이 불편한 옷만 입었으니 입어보고 샀어도 이 옷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성복을 몸에 붙도록 입으니 가슴이 불편해서 결국 몇 번 입다 말았다. 그래서 한동안 방어막을 넘지 않다가, 이 실패가 잊힐 즈음 다시 한번 SPA 매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여성복을 고를 때 나의 사이즈인 라지 사이즈로 골랐다. 신기하게도 품이며 길이가 딱 맞아떨어졌다. 난생처음으로 옷가게에서 환영받는 기분을 느꼈다.
남자 옷을 고르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스몰 사이즈를 입는 남자와 스몰 사이즈를 입는 여자, 라지 사이즈를 입는 여자와 라지 사이즈를 입는 남자의 몸 크기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여성복은 몸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고, 남성복은 몸을 더 크게 보이게 만든다. 여성들은 작은 옷에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남성들은 “남자라면 XL지” “105 사이즈 입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근데 심지어 여성복은 66 사이즈로 대변되는 라지 사이즈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경제가 어려워지자(애당초 경제와 여성의 노출이 상관관계가 있는 사회라는 게 역겹지만) 라지 사이즈도 점점 작아지는 추세다. 백화점에나 가야 스몰, 미디엄, 라지 사이즈가 있고, SPA 브랜드에 가도 남성복이 대여섯 가지 사이즈로 나오는 동안 여성복은 두어 가지 사이즈나 챙기면 다행이다. 저렴한 길거리 매장은 오로지! FREE 사이즈라고 이름 붙인 미디엄 사이즈만 판매한다.
여성복은 몸에 딱 붙어 밥 한 숟가락 더 먹는 것도 주저하게 만들고, 몸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다 못해 근력운동조차 ‘라인이 예뻐지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만든다. 미국 여성들이 우리나라 여성들보다 더 체격이 크고 근육량이 많은 데에는 인종이 다양한 만큼 옷의 사이즈가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쇼핑몰에 가면 청바지에 허리사이즈와 길이에 따라 열 가지 이상의 사이즈가 있다(시장이 큰 이유도 한몫한다고 본다). 게다가 그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스포츠를 안 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솔직히 한국이니까 수상할 정도로 근육이 많은 직장인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다. 입을 걱정 없이 잘 먹고 운동만 꾸준히 해도 근육을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