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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06. 2024

파란 수국이 핀 계절엔 비밀의 정원으로 가세요

남해 용문사의 숨겨진 정원, 용왕당을 찾아서


간밤에 열 시 반 좀 넘어서 기절하듯이 잠들었는데, 눈 떠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늘도 과연 린지 님이 새벽요가를 가시려나, 생각했는데 곧 카톡이 왔다. 같이 요가를 갈 사람이 있으니 린지 님도 신이 나나보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머리의 까치집을 물로 대충 누르고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하루 선생님이 하타요가를 가르쳐주시는 날이다. 어제의 아쉬탕가가 근력 강화에 좋았다면, 오늘은 몸을 구석구석 늘려주고 치유하는 느낌이다. 아침부터 요가를 하니 뭔가를 해낸 기분이 든다.



요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전날의 일기를 썼다. 원래는 그날 써야 하는데, 피곤하니 이겨낼 도리가 없다. 한참을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슬렁슬렁 라운지로 가보니 다들 식사준비하러 간단다. 라운지 앞 텃밭에서 같이 상추를 땄다. 오늘 메뉴는 상추 겉절이다. 딱 1인분 남은 된장찌개에 물을 부어 간을 맞추고, 버섯을 새로 잘라 넣어 미니 3인분으로 만들었다. 어제 담갔다는 양파장아찌도 꺼냈다. 다들 한 메뉴씩 해서 내놓으니 밥상이 풍성하다.



장마철이라더니 낮에는 계속 날씨가 좋다. 습도는 조금 높지만 견딜만한 정도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용문사 수국이 예쁘게 피었다는 얘기를 듣고 가보기로 했다. 용문사는 호구산 자락에 있다. 보리암만큼 길고 가파르지는 않지만 용문사 가는 길도 제법 경사가 있다. 절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갈까 하다가 내리쬐는 태양볕을 보고 포기하고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용문사는 계곡을 끼고 있어 계속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다리를 건너 경내로 들어갔다. 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누각이 보인다. 누각 아래로 들어가니 누각 기둥과 바닥 사이로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이 보인다. 전형적인 누하진입(누각 아래로 들어가 자신을 낮추며 사찰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대웅전을 둘러보았다. 외부보다 내부 천장의 화려함이 눈에 띈다. 천장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거북, 게, 물고기, 해초 등을 장식해 두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던 터라, 동물 하나하나를 찾아보았다. 바닷가 지역의 건축은 이런 디테일에 신경을 쓴 게 재밌다. 대웅전을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파란 수국, 분홍색 수국이 사방에 피어 있다. 차례로 전각들을 살펴보는데 빨간 배경에 노란색 글씨로 대불, 용왕당 가는 길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사전지식 없이 온 사람에게 이런 표지판은 아주 유용하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대로 화살표를 따라 올라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딸, 삼촌과 온 듯한 나이 든 조카 등, 용문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양쪽으로 장식하듯 수국이 가득 심어진 높다란 돌계단이 보인다. 느낌상 '대불'이 모셔져 있을 곳이다. 계단을 오르니 불상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지장 삼존대불이다. 대불을 등지고 계단을 내려다보니 올라올 때보다 수국이 더 흐드러지게 핀 것 같다. 저 뒤로는 전각들의 지붕과 안개에 휩싸인 호구산이 보인다.



대불에서 나와서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다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모인 전각을 발견했다. 이 네 가지는 불교의 네 가지 법구로 사중사물이라고 부르는데, 범종(종)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 법고(북)는 땅에 사는 중생, 목어(나무로 만든 물고기)는 물에 사는 중생, 운판(금속으로 만든 구름)은 하늘을 나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야말로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위해 기도한다. 새벽 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울리는 범종 소리는 마음도 맑게 해 준다. 



뒤로 난 길을 따라가니 수국이 핀 흙길이 나온다. 폭포 소리를 따라 올라갔는데 세상에 물 색깔도 파아란 빛이다. 안쪽으로 웬 전각이 하나 있어 자세히 보니 바로 표지판에 쓰여있던 용왕당인 모양이다. 한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물길 사이로 난 돌계단을 건너 용왕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마치 비밀의 정원 같다. 여름에 시원한 물소리를 즐기러 오기 좋은 곳이다.


용왕당에서 더 올라가면 암자가 몇 개 나온다. 암자 근처에 남해 바래길 표지판이 붙어 있다. 용문사 계곡을 끼고 있는 산길이다. 나는 꼬요(꼬마요원)라는 이름을 붙인 경차를 타고 다니는데, 서울에서는 경차를 운전하는 재미가 있다. 어떤 주차장에서든 두어 번 후진하는 것만으로도 유턴을 해서 나올 수 있고, 골목길을 들어갈 때에도 두렵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꼬요는 빠르진 않지만 어디든 가지”라는 말을 즐겨한다. 그런데 남해에 와보니 걷기도 마찬가지다. 바래길은 걷기 길이라 생각보다 험하다. 어떤 길은 자동차로 갈 수도 없고,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뛰기엔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 오로지 걷기,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걷기만이 그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이다. 걷기는 빠르지 않지만 어디든 갈 수 있는 방법이다.



아침엔 요가, 오후에는 절에 다녀왔더니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낸 기분이다. 다시 차를 타고 팜프라촌으로 돌아와 라운지에서 브런치를 업로드하고, 저녁은 간단하게 시리얼로 해결했다. 방으로 돌아와 편지를 한 통 썼다. 손글씨가 전하는 진심을 생각하며. 자기 전에는 <비폭력 대화>라는 책을 읽다가 잤다. 나의 욕구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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