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새해, 그리고 우수
유난히 추웠던 남해에서의 겨울이 지나간다. 밖에서 물 얼 일 많지 않다던 남해 날씨는 올 1월 내내 영하를 오갔다. 심지어는 한번은 사무실 수도가 동파되기도 했다. 어디선가 봤던 해결책으로 핫팩 세 개를 동시에 흔들어 걸레로 감싸 계량기에 넣어뒀더니 잠시 후 쿠르릉 소리와 함께 싱크와 세면대에서 물이 세차게 나왔다. 건물은 다 낡은 탓에 단열성능을 기대하기 어렵다. 전기를 펑펑 쓰자니 전기세가 무섭고, 기름보일러를 펑펑 틀자니 한 드럼에 26만 원이나 하는 기름값이 무서워 아껴서 튼다. 화장실이 너무 추워서 고민하다 산 욕실용 온풍기는 올 겨울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씻으러 들어가는 것이 덜 두려워졌지만, 결국 전기세가 아까워 수영장을 등록했다. 덕분에 아침마다 수영을 하고 출근하는 갓생 라이프를 살게 됐다.
남해에서는 실내에서도 패딩을 입는 게 습관이 들었다. 집에서는 아주 포근한 혹한기용 잠옷을 입는다. 서울 살 때에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집에서 반팔을 입고 있었는데(이것도 마지막에 살던 준신축 투룸에서의 일이지, 그전에는 마찬가지로 오들오들하면서 지냈다). 실제 온도는 서울이 훨씬 춥다고 해도, 남해에서는 겨울이 더 춥다고 느낀다. 일상적으로 사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온도에 있다가 잠시 나갈 때 추운 것과, 바깥 날씨가 비교적 포근하다고 해도 일상생활이 추운 것의 차이다. 그러다 보니 겨울 내내 배가 고팠다. 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몸이 지방을 비축하기로 결정한 탓이다. 남해의 겨울엔 사람도 길고양이도 둥글둥글해진다.
자연과 가까이 살고 사계절을 느끼다 보니 절기도 더 열심히 챙긴다. 절기가 달력에 쓰인 하루가 아니라 기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입춘이 시작하는 시간에 입춘첩을 붙이면 복이 더 많이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겨우 오전에 붙였다. 올해 대길하게 해 주세요, 하는 염원을 담아서. 입춘 다음 날 옆집 사장님께서 입춘첩 하나를 더 주셨다. 읍장님께서 주고 가셨다는데, 열어보니 남해향교에서 쓴 한 장 짜리 입춘첩이다. 얼른 친구들 단톡방에 올려 먼저 연락 온 친구에게 나눠줬다. 입춘이 기간이란 걸 알게 됐으니 하루이틀 늦게 붙였다고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설에는 친구들과 한 집에 모여 떡국과 비빔밥을 먹었다. 남해가 고향인 친구네 집이라, 음식이 모두 남해식이다. 비빔밥 나물에는 미역나물과 톳두부가 섞여있었다. 시금치나물은 유난히 달고 맛났다. 멸치로 국물을 내서 시원한 맛의 떡국을 처음 먹어봤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나이를 두어 살 더 먹은 후에야 식사가 끝났다. 그다음에는 한과와 식혜와 과일을 먹고, 그다음에는 케이크를 먹고... 풍성하고 둥글둥글해진 마음이 되어 다 같이 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쇠섬에서 강아지들은 목줄을 풀고 달리며 자유를 만끽했고, 친구들은 실없는 소리로 제각기 떠들며 깔깔거렸다.
설 다음날에는 사무실에 나왔다. <아무튼, 명상>을 필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리저리 지저분했던 책상을 정리하고, 잎이 떨어진 식물들을 정돈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입춘첩을 태웠다. 입춘첩을 일 년 내내 붙여두는 곳도 있지만, 이렇게 우수 전날에 떼어서 태우거나, 잘 보관해 뒀다가 다음 해 입춘에 다시 붙이는 것도 괜찮다고 한다.
우수는 비 우(雨) 자에 물 수(水) 자를 써서, 눈이 녹아 비가 되고 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본격적으로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절기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해서 만난 옆 집 사장님께 커피 두 잔을 타다가 드리고 사무실 청소를 하는데, 청소기 소리를 뚫고 웬 북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화전농악이라는 커다란 팻말을 든 풍물패가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우수에는 본격적인 농사 채비를 시작하는 시기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런 풍습을 지신밟기라고도 한단다. 올 한 해는 농부 친구들에게 풍년이 들기를, 그리고 (나를 포함한) 자영업 친구들에게는 대박이 들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