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감 세계관

감러버에게 감이 쏟아지다

by 문마닐

많고 많은 과일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단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감은 딱딱할 때도 아삭아삭하니 맛있고, 적당히 익어서 쫄깃한 식감으로 먹을 수 있을 때도 맛있고, 완전히 푹 익어서 달콤하게 흘러내릴 때도 정말 맛있다. 커다랗고 말캉한 대봉감은 또 어떠한가. 설익은 대봉감만큼 꺼끌 거리는 과일도 없겠다만, 완전히 다 익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의 진한 주황빛 대봉감은 반투명한 껍질 안에 가을 최고의 단맛을 품고 있는 과일이다.


서울에 살 때에는 집 가는 길에 있는 과일가게에서 줄줄이 엮여 있는 단감의 가격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느끼곤 했다. 5개 들이 한 봉지에 7~8천 원 하면 아직 여름인 것이오, 5천 원이면 가을로 들어선 것이오, 그 이하면 가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가을로 들어선 가격의 단감은 늘 한 두 줄 정도 냉장고에 저장해 둔다. 퇴근하고 하나 깎아먹고, 주말이면 두 개 깎아먹고, 친구가 오면 세 개는 깎아 대접한다.


남해에 온 이후에는 어쩐 일인지 감을 살 일이 없어졌다. 더 이상 감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감을 나눠줘서 그런 것이다. 남해에서 감의 계절을 감각하는 방법은 서울과 사뭇 다르다. 친구들이 어디선가 처치 곤란할 정도의 단감을 받아 "단감 챙겨갈래?"라고 묻기 시작하면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남해에서는 감나무를 본 적이 많지 않다. 남해에서 가까운 도시들이 감 농사를 많이 지은 게 이유일 테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하동, 산청, 함양, 그리고 인근 대도시인 창원과 김해도 감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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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서 만난 하늬언니는 고향이 하동이다. 언니의 가족들이 다 서울과 수도권에 있으니 가장 가까이 있는 나에게 감과 무화과를 따서 챙겨가라고 종종 권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출장 가는 길에 섬진강변에 있는 그 집에 들러 어디 잘 익은 녀석들이 없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합법적 서리다.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에 가지가 쳐질 정도로 감이 많이도 열린다. 아직 나무에 달려 있는 녀석은 몇 개 따다가 봉지에 챙기고, 다 익어서 바닥에 떨어져 반쯤 터진 감은 주워서 맛본다. 차원이 다른 단맛에 눈이 대봉감만해지는 가을이다.


남해읍에서 1인 가구인 나를 유달리 잘 챙겨주는 두 집이 있는데, 그중 한 집이 희수·진아네다. 마파람 사진관을 운영하는 남해 토박이 희수 씨가 서울에서 온 디자이너 진아를 만나 작년에 두모마을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읍에서 가까운 토촌마을에 있는, 숙소로 쓰던 예쁜 집을 구해 신혼살림을 차렸다. 가끔 그 토촌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날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토속음식에 진심인 진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연구가'로 불린다. 둘 다 과일을 즐겨 먹지는 않는데, 희수 씨는 시장만 지나다녀도 어르신들이 자꾸 과일을 손에 쥐어주시고, 진아 부모님이 택배로 보내주기도 하신단다. 그 집에 과일이 들어오면 그중 몇 알은 꼭 내 사무실에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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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과 양식을 넘나드는 요리연구가 김진아 선생의 집밥


또 한 집은 집 근처 찻집 오실재다. 오실재 사장님은 블렌딩티에 진심이다. 각종 과일을 산지에 가서 몇 박스씩 사 온 후에, 그걸 일일이 손질하고 자르고 말리고 덖어서 차에 넣으신다. 직접 시금치 농사를 짓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 사무실까지 출근하는 길목에 찻집이 있는데, 유난히 바빴던 지난해 연말에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할 때 찻집에도 불이 켜져 있어서 오며 가며 들르다가 친해졌다. 1인 사업자끼리의 동료의식이랄까. 한밤 중에 몇백 인분의 차를 포장하는 걸 도와드리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가져다 드릴 때도 있다. 그러면 사장님은 밥은 먹었냐고 물어봐주시고, 영업을 마치고 난 저녁자리에 밥 한 그릇 수저 한 벌을 더 놓아주신다던가, 잘 익은 예쁜 대봉감을 하나씩 포장해서 주신다. 그렇게 받은 단감은 나의 아침식사가 되고, 손님대접용 과일이 되고, 찻자리의 다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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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먹거리로 계절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오실재를 추천한다. 제철과일을 덖어 만든 차, 갓 만든 팥죽, 맛있는 티와 즐거운 대화가 오간다.


사무실에 불이 밤늦게까지 켜져 있으면 희수진아가 지나가다 "밥 먹자!"하고 옆집에 데려가 저녁을 먹인다. 그러면 나는 "고기 땡긴다! 같이 먹을 사람!" 하고 다음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월요일에 유난히 일찍 출근하는 날이면 옆집 무한설비 사장님도 출근 준비를 하고 계신다. 씩씩하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드리고는 내 커피를 내리며 사장님과 직원 분 커피도 두 잔을 타서 갖다 드린다. 그러면 어느 날 밤 사장님이 불 켜진 사무실을 보고는 제사상에 올렸던 떡을 가져다주신다. 또 다른 날은 쿨하게 웬 봉지를 주고 가시길래 "이게 뭐예요?" 하니 "유자차! 선물!" 하고 다섯 글자로 마음을 표현해 주신다. 경상도 아저씨들의 효율적인 대화법에서 나날이 매력을 발견해 가는 요즘이다.


읍에도 사랑이 있고 우정이 있고 정이 있고 행복이 있다는 걸 매일매일 발견하고 있다. 선선하니 시원했던 단감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새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이 찾아왔다. 요즘의 행복은 족욕과 수영에서 찾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자를 눌러쓰고 수영장으로 향한다. 시골집에서 화장실은 집에서 가장 추운 공간이기에, 틀자마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영장은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스무여 바퀴를 돌고 온수풀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하는 게 하나의 행복이오, 샤워를 하고 건식사우나에서 10분 정도 땀을 내는 게 두 번째 행복이다. 출근해서 사과에 땅콩버터를 발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꽉 채운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화장실 온풍기를 틀고(올 겨울에 산 최고의 아이템이다) 보일러 온수버튼을 누른다. 샤워를 마치고 목욕가운을 걸친 뒤 15분간 족욕을 하며 책을 읽는 게 세 번째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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