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행자로
2025년이 다 끝나가는 지금, 남해에서의 1년을 돌아보고 있다. 복잡다단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남해로 내려온 지 365일을 꽉 채워가는 요즘. 여행자로서 평화로웠던 남해는 거주자로서는 치열한 곳이었다. 굶어 죽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에서 잘 챙겨주는 사람들뿐이지만, 또 잘 먹고살기 위해서는 도시만큼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곳. 평화를 찾아 내려왔지만 누구나 N잡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곳.
요새 바다를 보는 시간이 참 귀하다. 바쁘기도 바빴지만, 가장 큰 이유는 7월 말쯤 두모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공유오피스로 쓰던 라운지 공간에 다른 사업 아이템을 준비하게 되어 사업자를 빼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남해읍에서 친구가 하던 카페를 정리한다고 했다. 위치도 너무 군청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래도 대로변에 면해 있어서 눈에 아주 안 띄지는 않는 위치에, 공설운동장 주차장도 가까워서 손님들 주차도 어렵지 않은 바로 그런 자리에. 가구도, 카페 기물도 모두 인수하기로 했다.
당분간 두모마을에서 출퇴근할 생각이었는데, 한번 시세나 보자 하고 남해군청 사고팔고 게시판에 들어가 봤다. 원하는 가격대의 집이 몇 군데 나와있어 하루 동안 쭉 돌아봤는데 맨 처음 찾아간 집이 가장 저렴하고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집주인도 정말 좋은 분이고. 이런 집은 쉽게 구하지 못할 것 같아 바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집도, 사무실도 읍으로 나오니 두모마을에는 자연스레 발길이 너무너무 뜸해졌다. 가끔 상주면에 갈 때에 들르거나, 팜프라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늘 '오랜만이다' 생각할 때쯤 갔다. 그래도 항상 웃으며 반겨주는 이장님과 사무장님, 그리고 친구들이 있어 든든했다. 나에게 두모마을은 이제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마음의 닻을 내릴 곳이 생기니 어쩐지 가슴이 한 뼘 더 펴지는 기분이다.
바다도, 두모마을도 그리워하며 남해읍 사무실에 틀어박혀있기를 며칠 째. 친구가 두모마을에 다 같이 놀러 가자며 불러냈다. 함께 놀 기회가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크리에이투어라고, 크리에이터와 투어를 합친 말이라는데. 남해에선 어떻게 뭐 하고 노나 보여주는 기획이라고 한다. 사진관 하는 희수 씨와 디자인하는 진아, 기획하는 금실언니와 농사짓는 필주까지. 다섯이서 모여서 서울농장에서 하룻밤 자고, 두모마을 농촌체험을 하고, 근처 은모래비치에서 점심까지 먹기로 했다.
따뜻한 두모스테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전에 다 같이 라운지로 모였다. 사무장님께서 브리핑을 한 차례 해주시고 일정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몇 명 모였을 뿐인데 벌써 상에는 과일과 빵이 한가득이다. 어딜 가든 인심이 좋은 게 남해 특징이다.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갑자기 마을 어르신들이 커다란 대야를 두고 가신다. 펄떡펄떡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물메기다. 옛날엔 못 생겨서 다들 내다 버렸다는데, 요새는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음식이라고 한다. 다들 궁금해하니 사무장님이 비닐장갑만 낀 채로 맨손으로 두 놈을 한 번에 들어 올리신다. 와, 녀석들 힘도 좋은데 사무장님이 더 굉장하셔.
얼추 이야기도 마무리되었겠다, 다들 빵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두모마을을 한 바퀴 산책하러 나서기로 했다. 못 본 새 표지판도 새로 세워지고, 시금치도 오동통한 잎사귀를 땅 위로 한껏 뻗치고 섰다. 아, 이 풍경에 반해서 남해로 왔지. 두모천에는 노랗게 물든 갈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내가 참 좋아하는, 겨울의 조용한 두모마을이다.
오랜만에 다 같이 와서 재잘거리고 걷다 보니 마음이 즐거움에 한없이 방방 떠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온통 차분한 것들 뿐인데도. 골목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어느 어르신의 광에는 물건들이 참 가지런히도 정리되어 있다. 같은 집 마당에는 배추가 줄지어 배가 불러가고 있다. 또 어느 집 마당에는 물메기를 말리고 있다. 트랙터를 타고 지나가는 어르신과 인사를 나눈다. 농번기 급식 때 자주 뵈었던 분이다.
남해의 바다에서는 신기하게도 물 비린내가 잘 나지 않는다. 배가 꽤 많이 정박되어 있는 제법 큰 어촌마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다냄새라고 생각했던 그 비린내가 사실은 오염된 물에서 나는 썩은 냄새였다는 걸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서울에서는 현관문 안쪽만 우리 집이지만, 이곳 어르신들은 으레 마을까지 내 집이라고 생각하신다. 처음 두모에 왔을 때 재활용 내놓은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스에서 테이프 조각까지 모두 뜯어내서 깨끗하게 정리하고, 노끈으로 정갈하게 묶어 내놓은 모습이 마치 일본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느 어르신은 새벽마다 두모천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다. 바다가 깨끗하게 유지되는 것은 비단 사람이 적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모두가 내 집이라는 마음으로 가꿨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금치 밭에서 단체사진도 한번 찍어본다. 파릇파릇한 요 시금치는 서리 몇 번 더 맞고 해풍 시원하게 불 때 점점 더 달아진다. 1월이 되면 단맛이 제일 좋다. 통통하게 싱그러운 시금치 잎을 보자니 입에 침이 고일 정도다.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바로 남해 섬초 때문이다.
마지막 코스는 파라다랑스다. 다랑논을 마을공원으로 만든 사례다.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가 손님들을 맞이하는데, 모양이 마치 두꺼비 같다고 해서 두꺼비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큰 바위들이 굴러왔을까 생각하니 바로 위에 바위산인 금산이 보인다.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여기까지가 산인 걸까.
파라다랑스를 끝으로 두모마을 식구들과는 인사를 나누고 은모래비치로 향했다. 오랜만에 수제버거를 먹어보기로 한다.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블루칼라에는 재밌는 외국 식재료와 장식품도 같이 판매하고 있다. 키오스크로 주문한 후에 트레이를 받아 모여 앉았다. 닭다리살의 육즙이 가득한 버거 맛이 아주 일품이다.
투어의 마지막은 카페 잔잔이다. 마찬가지로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작은 카페다. 이곳의 에그타르트를 특히 좋아하는데, 과하게 달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맛이 최고다. 두모마을에 살 때는 종종 두모마을에서 산을 뛰어넘어서 이곳 잔잔까지 와서 음료수를 마신 후에 다시 달려서 돌아가곤 했다.
잔잔에는 특이한 음료가 많다. 오늘은 새로운 걸 주문해 봤는데, 디카페인 커피가 올라간 코코넛 음료다. 신기하면서 색다른 맛인데 또 생각나서 다시 올 것 같다. 음료와 간식이 다 나오자 사장님도 슬쩍 옆에 앉아 같이 이야기를 나누신다. 만나는 모두가 친구인 남해의 세계관이다.
오래간만에 쉬는 느낌이 들어 행복한 하루였다. 자영업을 시작하고 나니 쉬는 날이 따로 없이 계속 일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마음먹고 놀러 나와야 제대로 쉰다. 이렇게 행복한 휴식의 날을 함께해 준 친구들과 두모마을, 은모래비치에 감사할 뿐이다. 다음에 또 만나서 같이 놀아요.